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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보균 기자
1954년 프랑스 물리친 승전지, 베트남 디엔비엔푸를 가다
남중국해는 긴장이다. 미국과 중국은 맞선다. 베트남과 중국도 대치한다. 중국은 베트남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베트남의 안보투지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의 사드 배치 상황과 비교된다.
조각상은 간결하다. 용사 세 명의 형상. 뒤쪽 군인은 기관총을 들었다. 앞쪽 한 명은 깃발, 다른 한 명은 어린 소녀를 들어올렸다. 소수민족 타이(Thai)족 아이다. 꽃다발을 쥐었다. 깃발에 새긴 글귀는 『』-. 결전결승(決戰決勝, 전쟁을 결심하면 승리를 결심한다) 구호다. 총(항전)과 꽃(평화), 그리고 투혼. 단순함은 강렬하다. 관광 가이드는 “뀌엣찌엔, 뀌엣탕은 호찌민(胡志明)의 신념이며, 지압 장군이 실천했다”고 했다. 호찌민은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다. 지압은 군 최고지휘관, 국방장관이다.
디엔비엔푸는 벽지다. 왜 결전의 장소가 됐나. 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항복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를 포기했다. 다음은 일본 지배다. 1945년 8월 일본은 항복한다. 프랑스는 재기했다. 미국·소련·영국의 힘이다. 그리고 인도차이나에 다시 진주한다. 그것은 식민지 복원이다. 역사의 치사한 퇴행이다.
프랑스군은 7개의 진지를 구축했다. C-119 수송기로 대포와 탱크, 식량, 증원군을 공수했다. 비행장은 2차 대전때 일본군이 만든 것. 105mm 곡사포(24문), 155mm 야포(4문), M-24 채피 경(輕)전차(10대)를 배치했다. 병력 1만6200명. 전투기(F8F Bearcat)의 지원공격. 나바르는 화력과 기동력의 우위를 믿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확신했다. “적군이 몰려와 우리를 포위할 것이다. 적군이 평지로 나오면 요새는 고슴도치처럼 작동한다. 그때 섬멸적 타격을 한다. 주변은 산과 계곡이다. 적군은 중형 대포를 가져오지 못한다.” (마틴 윈드로우 저서 『마지막 계곡』 2005년)
“승패는 보급에서 판가름 났다.”- 전쟁사학자 찰스 슈래더(Charles.R. Shrader)의 진단이다. 그의 역작 『병참(兵站) 전쟁』(A War of Logistic, 2015년 펴냄)의 부제는 낙하산과 짐꾼. 짐꾼 인원은 3만3000명, 보급 수단은 자전거 2만 대. 양쪽에 대나무를 걸쳐 짐차로 개조했다. 자전거는 포대자루 네 개(최대 320kg)를 실었다. 식량(총 2만7000t), 탄약을 날랐다. 밧줄, 자전거, 포대자루, 삽, 곡갱이가 전시돼 있다. 진열품은 고난과 투지를 증언한다. 사병들은 자주 생쌀을 씹었다. 쌀밥 짓기가 힘들었다. 프랑스 정찰기는 연기를 추적했다.
54년 1월 하순. 지압의 부대는 디엔비엔푸 외곽에 도착했다. 산속에 숨었다. 산 위에 대포 진지를 마련했다. 우공이산은 눈부시다. 105mm 곡사포(36문), 75mm 대포(24문), 박격포(50문), 12.7mm 대공화기(36문), 소련제 다연장포(12문)가 포진됐다. 화력에서 우위에 섰다. 지압은 ‘신속 진격’에서 ‘점진 공격’으로 바꿨다. 그는 “그 변경은 힘든 결정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시점과 장소를 택해야 이긴다”고 회고했다. 은닉과 위장은 계속됐다. 프랑스군의 정찰 수색은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덫에 갇힌 신세다. 활주로 파괴로 이착륙이 어려워졌다. 낙하산 투하로 대체했다. 비와 구름에 가려져도 베트민군의 레이더 장착 대공포는 위력적이다. 프랑스군은 수송기의 고도를 높였다(2500에서 8500피트). 높은 고도의 낙하는 정확하지 않다. 드카스트리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그의 부인은 핑크색 축하편지를 보냈다. 그 자루는 베트민군 진지에 떨어졌다. 낙하산 공수(8만 개 투하) 작전은 실패했다. 프랑스 항공기(전투기, 수송기, 헬기) 손실은 62대.
박물관에 적힌 글귀가 눈길을 끈다. “승리의 원천은 나라를 지키려는 불굴의 의지다.” 한국 사회의 안보 불감증은 심각하다. 사드 배치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중국의 사드 반발은 거칠다. 중국은 한국을 무시한다. 경제보복 카드를 만지작댄다. 한국의 다수 정치인들은 눈치다. 중국 반응을 살핀다. 베트남의 단호함과 대비된다.
나는 마지막 격전지로 갔다. A-1 언덕(엘리안 2) 요새. 26일간 점령과 재탈환이 이어졌다. 지압의 군대도 사기가 떨어졌다. 참호전의 어려움, 죽음의 공포, 배고픔으로 사병들은 낙담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역전의 모멘텀을 만들지 못했다. 베트민군은 터널을 팠다. 요새 밑에서 800kg의 폭탄을 터뜨렸다.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땅굴 폭파로 분화구 같은 구덩이가 생겼다. 그 옆에 전차가 전시돼 있다. 포신은 굽었다. 바퀴와 캐터필러는 망가져 있다. 미국인 관광객 제롬 필슨(59세)이 사진촬영을 부탁한다. 그는 “2차 대전, 한국전쟁에서 선전한 채피(Chaffee) 전차다. 이곳 우기(雨期)의 진흙탕에서 무용지물이었다. 프랑스군은 채피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했다.
DA 300
5월 7일 최후의 돌격이다. 목표는 최고 지휘본부 벙커다. 사령관 드카스트리는 벙커에서 붙잡혔다. 그 순간이 새겨진 붉은색 조각상이 있다. 고개 숙인 사령관의 표정은 절망이다. 그것은 오만과 깔봄의 잔인한 대가다. 현장은 그 교훈을 격정적으로 표출한다. 나는 그곳에서 마틴 윈드로우의 책 『마지막 계곡』을 펼쳤다. “벙커 위 지압의 군대는 승리의 깃발을 휘날렸다. 그 장면은 21년 뒤 다른 형태로 재현된다. 75년 4월 사이공(지금 호찌민시)의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군 헬기의 최후 탈출이 있었다.”
56일간 전투 드라마는 마감됐다. 프랑스군은 참패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식이다. 프랑스군 사망·실종자는 3400여 명, 포로는 1만1700명(부상자 4400명). 베트민군의 사망자 7900여 명, 부상자 1만5000명(프랑스의 추정 숫자)이다. 승리 다음날 5월 8일 제네바 회의가 열렸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포기했다. 하지만 나라 전체는 북위 17도선으로 분리됐다. 북부는 호찌민의 베트민(월맹), 남부는 월남공화국으로 나눠졌다.
◆보 구엔 지압(1911~2013)=20대에 신문기자와 역사교사. 30대에 호찌민(1890~1969)의 베트민(월남독립동맹)에 가세했다. 군 최고지휘관으로 프랑스·미국·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국방장관으로 60년~70년대 초 미국과 전쟁(73년 미군 철수)에서 이겼다. 75년 월남(남베트남)을 패망시켰다(통일 베트남). 79년 중국과의 전쟁 때 종합지휘를 맡았다.
디엔비엔푸·하노이(베트남)=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현장 속으로] 105mm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렸다…지압 장군의 공세적 상상력이 적의 허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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