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개국 참전용사협회 유일한 한인회장 알렉산드로스 장 씨

○ 그리스군 부대에 배속돼 인연 맺어
장 씨와 그리스의 인연은 1950년 12월 그가 꽁꽁 언 대동강을 맨몸으로 헤엄쳐 건너면서 시작됐다. 평양을 떠나 피란길에 오른 열네 살 소년은 얼음을 비집고 헤엄쳐 월남에 성공했다. 혈혈단신으로 피란 온 장 씨는 남해안 거제까지 가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다음 해 그는 해외 파병부대에서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먹고살려고 신청서를 냈다. 그렇게 장 씨는 강원 철원군에 주둔한 그리스군 부대에 배속을 받았다.
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장 씨는 “당시 그리스어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 거의 없어서 빨리 말을 배워 통역병이 됐다”며 “전쟁 끝나고 그리스군 연대장이 양자로 삼아 그리스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1951년 통역병 진급 당시만 해도 그리스와의 인연이 이토록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 정부 장학생에 선발돼 아테네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한때는 그리스정교회의 사제가 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 살다 보니 가족이 그리웠다. 장 씨는 같은 대학을 다닌 그리스 여성 안드레아니 장 씨(73)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1968년 장 씨는 무역을 통해 한국과 그리스 사이 가교 역할을 하기로 생각했다. 당시 전매청과 계약을 맺고 한국산 홍삼을 그리스로 들여왔다. 장 씨는 “지금 한국의 대기업들은 당시만 해도 그리스로 치면 보따리상 수준의 무역을 했다”며 “통역을 돕다가 직접 사업을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1970년 ‘헬레닉 코리안 트레이딩’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93년에는 아테네 상공회의소 한국-그리스 분과위원회장이 될 정도로 그리스 내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1970년까지 아테네에 사는 한국인은 장 씨가 유일했다. 혈맹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과 그리스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다. 태권도를 알리기 위해 직접 아테네에 도장을 열었고 한국 대사관의 제안으로 외빈 접대를 위한 한국식당을 차렸다. 88서울올림픽 때 그리스에서 성화를 들고 뛰기도 했다. 아내 안드레아니 씨는 “살아오면서 남편은 단 한순간도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버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장 씨는 한국 국적을 회복하기 위해 이달 특별히 방한했다. 3년 전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포기했던 국적을 더 늦기 전에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되찾으려는 것이다. 장 씨는 “한국 국적이 없어도 솔직히 그리스에서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며 “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위해 국적 회복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