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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품에 안겨 손흥민은 울었다

아우네 2017. 11. 11. 11:07

[from수원] 레전드 품에 안겨 손흥민은 울었다

기사입력 2017.11.11 오전 08:04 최종수정 2017.11.11 오전 08:33                         
[포포투=정재은(수원월드컵경기장)]

꼬박 1년이 걸렸다. 10경기 만에 손흥민의 골이 팀의 승리로 완성됐다. 10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EB 하나은행 초청 국가대표팀 친선 1차전, 콜롬비아를 상대로 두 골을 넣으며 손흥민은 한국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킥오프 11분 만에 들어간 손흥민의 골에 수원의 붉은 색이 후끈 달아올랐다. 김진수, 권창훈의 패스를 받으려 좌우 측면을 분주히 달리는 모습에 관중은 환호했다. 등번호 7번 에이스의 활약, 경기 후 손흥민은 가장 늦게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때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야, 흥민이!”라 불렀다. 손흥민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꾸벅 인사하더니 폭 안겼다.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이었다.

15분 전까지만 해도 위풍당당한 어깨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손흥민은 그의 품에 아이처럼 안겼다. 그리고 울었다. 귀와 코 끝이 붉어졌다. 차범근 전 감독은 한참 동안 토닥거렸다. 에이스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짐과 부담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어린 후배를 이해했다. 손흥민이 발길을 돌리자, 차범근 전 감독의 코는 빨개져 있었다.



# 손흥민의 눈물

에이스가 이날 보인 눈물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국가대표팀의 처참한 성적, 자신의 득점 부재 등등이다. 태극마크를 달고 이 정도로 많은 비난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표팀을 향한 여론이 악화할수록 한국의 에이스는 마음이 무거웠다. ‘골’에 대한 책임감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잉글랜드 명문팀 토트넘홋스퍼에서 뛰고 있다는 후광까지 더해져 그가 받는 기대감은 누구보다 컸다.

늘 국가대표에서의 손흥민과 토트넘 손흥민은 다른 콘텐츠로 소비됐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그는 응원을 받았다. 태극마크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순간 달라졌다. 골이 나오지 않고,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간신히 진출하고, 유럽 원정 2연전에서 모두 패하며 손흥민은 늘 가장 살벌한 도마 위에 올려졌다. 그는 ‘국가대표는 욕을 먹으러 가는 곳이다’라는 한 동료의 말에 씁쓸하게 공감했다.

11월 10일 비로소 웃었다. 콜롬비아와의 친선전을 치르기 위해 그는 리그 경기를 치르자마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프리미어리그 11라운드 크리스털 팰리스전에서 골을 기록한 직후였다. 한국에 도착한 손흥민은 곧바로 팀에 합류해 미디어와 인터뷰를 하고, 훈련에 투입됐다. 비행 11시간으로 인한 피로감, 아직 덜된 시차적응 등은 더는 핑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콜롬비아를 상대고 두 골을 넣으며 오랜만에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손흥민은 그제야 굳어있던 어깨를 풀었다. 반가운 목소리에 긴장이 탁 풀렸다. 레전드의 따듯한 포옹에 눈물을 보였다. 이제야 제 의무를 다한 한국의 에이스는 그토록 기다려온 승리에 이렇게 말했다. “경기 전부터 걱정을 많이 했다. 선수들도 그랬을 것이다. 이제 서야 무거운 짐을 털어낸 것 같다. 이제 더 자신 있게 경기에 뛰고 싶다.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아야 한다. 공을 뺏기면 다시 빼앗아오면 된다. 오늘처럼.”

# 활기찬 공동취재구역

한국은 이날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90분 내내 강호 콜롬비아를 상대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제골을 넣으며 경기를 주도했다. 후반전 실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다시 한 골 더 넣기 위해 달렸다. 기성용이 “오늘 두 골 이상 넣을 수 있는 경기였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은 공격 찬스를 많이 만들어냈다. 수비는 짜임새 있었다. 이근호부터 이재성, 권창훈까지 1차 압박을 통해 콜롬비아를 막았다. 콜롬비아 스타 하메스는 고요한이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잔뜩 짜증이 난 하메스는 넘어진 김진수를 억지로 일으키려 하는 등 비신사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권경원, 장현수 센터백 조합도 든든하게 버텼다.

경기 후 대표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라커룸으로 향하는 선수들은 지인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염기훈은 지인으로부터 “그 오른발 슛이 들어갔어야 하는데”라는 농담을 받고 민망한 듯 웃었다. 공동취재구역에서 기성용은 달라진 대표팀을 설명했다. “경기 전에 우리가 준비했던 게임 플랜을 100% 다 해냈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동료들을 향해 오랜만에 쓴소리가 아닌 칭찬을 했다. “상당히 좋은 경기를 했다”고 경기를 평가했다. “신태용 감독님 부임 이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전 경기들 결과가 아쉬웠다. 대표 선수라면 오늘같은 경기력을 보여줘야 한다. 오늘 선발 열한 명과 교체되어 들어온 선수들, 벤치에 있던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했다. 경기를 보신 분들, 경기장에 찾아오신 분들 모두 느끼셨을 거다. 다른 걸 떠나, ‘투지’있게 최선을 다했다”

이날 기성용부터 김진수, 권창훈, 최철순, 손흥민 등 다양한 선수가 취재진을 상대했다. 늘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부진’을 설명하던 대표팀의 모습은 더는 없었다. 웃음 소리로 가득했다. 김진수는 그란데 코치의 합류로 인해 “아침에 스페인어를 들을 수 있어 좋다. 인사 정도 배울 수 있다”며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다. 권창훈은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다. “이전에도 경기력 괜찮았는데…운이 없었던 것 같아요”라며 멋쩍게 웃기도 했다. 하메스를 봉쇄한 고요한을 두고 기성용은 “요한이가 최고의 활약을 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 하메스, 인터뷰 거부하다

한국 대표팀이 떠난 후에도 공동취재구역은 북적였다. 콜롬비아 언론사 3개도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콜롬비아 선수단을 기다렸다. 모두가 기다린 선수는 스타 하메스였다. 콜롬비아 취재진은 “하메스는 아마 오늘 인터뷰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기분이 안 좋은 탓이었다. 고요한에 봉쇄됐고 김진수, 기성용과 신경전도 벌였다. 신 감독은 “서울 경기를 보면서 농담으로 요한이에게 ‘K리그에서 네가 볼 제일 더럽게 찬다’라 말했다. 하메스는 몸싸움을 싫어하는 선수다. 처음부터 신경질적으로 도발해야 한다고 했다. 맨투맨을 시켰다. 계속 따라다니라 했다. 내가 부탁한 것을 100% 만족스럽게 실행했다”라 설명했다.

한국이 떠난 지 약 20분 후, 콜롬비아 선수단이 무리 지어 공동취재구역에 등장했다. 하메스는 뒤늦게 홀로 빠져나왔다. 취재진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자국 미디어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의사 표시였다. 경기 전날까지 “안녕하세요”라며 한국 축구 팬들에게 인사하고, 선수단 짐을 싣는 카트를 타고 꺄르르 웃던 하메스는 하루 만에 표정이 바뀌었다.

콜롬비아는 11일 중국과의 친선전을 위해 떠난다. 한국은 세르비아를 상대하기 위해 같은 날 울산으로 향한다. 남미 강호는 자존심을 팍 구겼고, 한국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다.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던 결과, 그리고 과정. 경기 전날까지도 한국 대표팀 명단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 호세 페케르만 감독은 “많이 힘들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사진=FAphotos, 영상=포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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