鳴粱 海戰圖 와 명장 이순신
이순신장군의 명언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마라.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수비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만들었고스물 세번 싸워 스물 세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옳지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말라. 잃었고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鳴粱海戰圖
진도 울돌목 동영상-[이순신 장군 명량해전 명소 (명량대첩지 어룩비)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이 서남해 제해권과 호남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은 임진왜란 발발 후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던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육로병진 전략을 막음으로써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확보할 수 있었고, 육로보다는 효과적인 기동력을 확보할수 있는 수로를 통한 진격을 막고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의병이 봉기하고, 조ㆍ명 연합군이 반격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명량해전만큼 극적인 경우가 없었다. 1597년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왜 수군에 대패하여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을 금하고 육전에 주력하도록 명할 정도로 위용을 떨치던 조선 수군의 전함은 칠천량 해전에서 거의 파괴되고 살아남은 수군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후 제해권을 장악한 왜군은 여세를 파직 끝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이 수습한 세력은 전선 12척과 군사 120여명이었다.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재건의 교지를 내렸지만 잔존 수군세력으로는 왜 수군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해상에서 버틸 수 없으면 육상으로 올라와 육전을 도와도 좋다는 명을 내렸다.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진도 벽파진에서 진을 치다가 서해로 진격하는 왜 수군을 울돌목에서 맞아 일전을 치르게 된다.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나, 조류가 빠른 울돌목을 등지고 싸우는 것보다 울돌목에서 상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명랑해전 하루 전에 진영을 우수영으로 옮기게 된다. 이끌고 해남에서 목포방향으로 흐르는 북서조류를 타고 울돌목을 향해 오고 있었다. 10배가 넘는 왜군 전선에 겁을 먹고 동요하는 군사들에게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고 하며 선두에서 독전하였다.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시작된 전투는 조선 수군이 고군분투한 끝에 조류가 목포에서 해남쪽 남동류로 바뀌면서 왜군 진영으로 빠른 물살이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왜선 31척을 격파하였다. 지휘관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살신성인의 솔선수범의 자세와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탁월한 지략, 죽기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임전무퇴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왜 수군의 서진을 막지 못하고 호남의 바다를 왜군에게 내주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그때 벌써 다했을지 모른다. 내며 흐르고 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왜군에게 대패하여 얼마남지 않은 조선수군의 전력을 우려하자 당시 이순신은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장계를 올렸다. 8월 왜선 8척이 해남의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옥포해전 [玉浦海戰] 1592년(선조 25) 5월 7일 경남 거제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기세에 전함을 버리고 수군(水軍) 1만을 해산시킨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海路)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에 응하여 이순신은 휘하의 판옥선(板屋船) 25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당포 앞바다에서 합세하였다. 이때 원균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70여 척의 전선을 모두 잃고 겨우 3척으로 합세하였다. 당포해전 [唐浦海戰] 1592년(선조 25) 6월 2일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연합함대가 경상남도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6월 1일 아침까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연합수군은 사천포해전을 통해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날 정오 무렵 이순신 함대 전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전선 3척은 삼천포(三千浦)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율포해전 [栗浦海戰]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1592년(선조 25)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 율포만으로 쳐들어가 대선 2척,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았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부산포해전 [釜山浦海戰] 이순신은 부산 부근의 서평포(西平浦)·다대포(多大浦)·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왜군 전선 24척을 격파한 뒤,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과 일본 본국과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먼저 부산포 내의 왜군의 상황을 정찰하였고, 왜군 전선 470여 척이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선두로 하고 전함대를 동원하여 왜군을 쳤으며, 그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상륙하여 대항하였다. 안골포해전 [安骨浦海戰] 1592년(선조 25) 7월 10일 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1592년 7월 8일 이순신·원균·이억기(李億祺)는 한산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섬멸한 다음, 안골포에 왜군이 머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일 새벽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학익진(鶴翼陣)을 펴 먼저 공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뒤를 따랐으며,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본대를 응원하였다. 칠천해전 [漆川海戰]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칠천에서 벌어진 해전. 칠천량(漆川梁)해전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은 주색(酒色)에 빠져 군율(軍律)이 극도로 문란해졌다. 1597년 7월 일본은 앞서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였던 한산도를 다시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정탐으로 가나메 도키쓰라[要時羅]를 밀파하여 조선군을 유혹하니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원균을 불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원균은 전병력을 동원하여 7월 7일 다대포(多大浦)에서 일본군의 빈 군함 8척을 불사르고 서생포(西生浦)에 이르러 적의 주력함대를 만나 패전하고 일부 군사는 풍랑으로 표류하는 지경이 되었다. 간신히 가덕도(加德島)에 당도한 원균은 다시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막대한 손해를 입고 거제도 앞 칠천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태형(笞刑)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에 원균은 불만과 실의에 빠져 군사를 돌보지 않고 전략상 해전에 불리한 칠천에서 이진(移陣)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일본군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출진(出陣)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의 육군도 칠천으로 향하였으며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원균은 일본군의 수륙양면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도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의 용사가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만이 생존하여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였다. 명량대첩 [鳴梁大捷]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싸움.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8월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노량해전 [露梁海戰]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은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들이었다. 그들이 주둔해 있던 곳에서 철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泗川)에 주둔 중인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小) 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얻어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 회전(會戰)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고승하님 제공> |
'살면서-받은 메일과 신문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경필 밀치고 욕설...'유민아빠 막말' 또 파문[동아일보8/28] (0) | 2014.08.28 |
---|---|
[스크랩] 부부 중 어느한쪽이 세상을 떠난다면 (0) | 2014.08.26 |
제주도에 낙도지원금 달라니...농해수위원장의 지역구예산 압력[동아일보에서] (0) | 2014.08.25 |
美, 정부-민간 함께 밑 그림....정권 바뀌어도 연속성 유지[동아일보에서] (0) | 2014.08.25 |
짐 데이터 교수 "정부개조 없는 혁신, 말에 GPS다는 꼴"[동아일보에서] (0) | 2014.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