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미국 국적, 北서 사업, 美스파이… "나는 경계인이었다"
입력 2019.06.22 03:01
[아무튼, 주말- 권승준기자의 한방] 트럼프가 석방시킨 김동철 박사
이념과 민족, 국가는 세상에 금을 긋는다. 대부분은 그 선을 넘지 않지만, 어떤 이들은 경계를 겁 없이 넘나든다. 김동철(66) 박사가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고 북한에서 사업을 벌이다 붙잡혔다. 붙잡힌 이유가 세상에 알려진 건 2016년 1월 10일. 미국 CNN방송을 통해서다. 북한은 CNN 기자를 평양의 호텔로 불러 김 박사의 인터뷰를 '설계'했다. 군인들이 김 박사를 죄수 호송하듯 끌고 왔다. 그리고 "1987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2001년부터 중국에서 북한을 오가며 사업한 사람"이라고 했다. 여권에는 국적이 미국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 박사는 CNN 인터뷰에서 "전직 북한 군인으로부터 기밀이 담긴 USB(대용량 저장장치)를 받으려다가 당국에 붙잡혔다"고 말했다. 중간중간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 정책을 포기하고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말하다가도 "미국과 한국 정부는 나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등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2년 4개월 후 김 박사는 다시 한 번 CNN에 등장했다. 작년 5월 10일 오전 3시(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인근 세인트 앤드루스 공군기지였다. 북한이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억류한 미국인 3명을 풀어줬는데 그 중 한 명이 김 박사였다. 그를 태운 비행기가 착륙할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박사가 손을 치켜들고 V 자를 그리며 비행기에서 나오는 모습이 CNN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에 송출됐다.
그 후 1년. 두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성과는 없다. 당시의 떠들썩한 환호나 기대 모두 희미해졌다. 그러던 중 김 박사가 한국에서 책을 출간할 것이란 소식이 들렸다. 제목은 '경계인'.
북한 고위층이 친척인 아내
한국에 온 김 박사와 연락이 닿았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김 박사는 말끔한 정장과 명품 시계를 찬 모습이었다. 딸이 사준 시계라고 했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유창한 한국어였지만 중간중간 북한 억양이 섞여 나왔다.
―한국 사람들이 박사님에 대해 아는 건 두 차례 CNN방송에 나온 게 전부입니다.
"1953년 서울 안암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광 중·고등학교를 나왔고, 1980년 6월 6일 미국 유학을 갔지요. 미군 부대 군속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알던 미국 분들이 스폰서를 해준 덕분에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신학대에 진학했고 박사 학위까지 땄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으셨죠.
"1985년에 아내와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중국 국적을 가진 한국 동포(조선족)였죠. 또 유학 자금을 대려고 청소 용역 사업을 한 것도 제법 잘되던 참이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엔 목회 활동도 열심히 했고요. 미국에서 삶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겁니다."
―미국서 안정된 삶을 누린 셈인데, 어쩌다 북한에서 사업을.
"2000년쯤 아내의 고향인 중국 옌볜자치구 옌지(延吉)시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북한 사람도 접할 수 있었는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운명적으로 저를 북한으로 이끌었습니다."
―뜻밖의 사실?
"아내의 배경이었습니다. 전에는 아내가 그저 중국 국적을 가진 우리 동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내의 큰아버지는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과 이종사촌지간이었고, 아내도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 동지였던 황순희(조선혁명박물관장)와 친척뻘이었어요. 아내의 사촌오빠인 김영지는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의 묘가 있는 소사하 촌장이었습니다."
―북한 고위층과 혈연이라는 뜻이군요.
"처음엔 그 배경을 활용해 북한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 정도였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죠. 먼저 옌지에 나와 있는 북한 대표부 사람들과 접촉해 아내의 배경을 알리고 면담했습니다. 아내의 신분이 확인되자 일사천리였죠. 며칠 만에 조선노동당 중앙당 통일전선부 초청으로 평양행 기차를 탔습니다. 아내가 '미국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주의를 주던 게 기억납니다."
―평양에서 사업 얘기가 오간 겁니까.
"아닙니다. 처음엔 2박3일 정도 관광 일정이 끝이었죠. 그 뒤로도 종종 옌지와 나선을 오갔습니다. 거긴 경제특구라 외국인 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고 중국인 관광객도 많이 갑니다. 3년 정도 왕래하다 보니 사업 구상이 섰습니다. 관광객 상대 호텔 비즈니스였죠."
―미국인 신분으로 북한에서 사업이 가능한가요.
"3년간 (북한 쪽에) 공을 많이 들였죠. 물론 아내 배경 덕도 많이 봤습니다. 2004년 나선시 인민위원회 주선으로 통일전선부 해외동포사업국과 줄이 닿았습니다. 전 재산 280만달러(약 33억원)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제 명의 단독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 평양에서는 불가능하고 나선시에 회사 설립을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더군요."
2년 4개월 후 김 박사는 다시 한 번 CNN에 등장했다. 작년 5월 10일 오전 3시(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인근 세인트 앤드루스 공군기지였다. 북한이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억류한 미국인 3명을 풀어줬는데 그 중 한 명이 김 박사였다. 그를 태운 비행기가 착륙할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박사가 손을 치켜들고 V 자를 그리며 비행기에서 나오는 모습이 CNN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에 송출됐다.
그 후 1년. 두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성과는 없다. 당시의 떠들썩한 환호나 기대 모두 희미해졌다. 그러던 중 김 박사가 한국에서 책을 출간할 것이란 소식이 들렸다. 제목은 '경계인'.
북한 고위층이 친척인 아내
한국에 온 김 박사와 연락이 닿았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김 박사는 말끔한 정장과 명품 시계를 찬 모습이었다. 딸이 사준 시계라고 했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유창한 한국어였지만 중간중간 북한 억양이 섞여 나왔다.
―한국 사람들이 박사님에 대해 아는 건 두 차례 CNN방송에 나온 게 전부입니다.
"1953년 서울 안암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광 중·고등학교를 나왔고, 1980년 6월 6일 미국 유학을 갔지요. 미군 부대 군속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알던 미국 분들이 스폰서를 해준 덕분에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신학대에 진학했고 박사 학위까지 땄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으셨죠.
"1985년에 아내와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중국 국적을 가진 한국 동포(조선족)였죠. 또 유학 자금을 대려고 청소 용역 사업을 한 것도 제법 잘되던 참이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엔 목회 활동도 열심히 했고요. 미국에서 삶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겁니다."
―미국서 안정된 삶을 누린 셈인데, 어쩌다 북한에서 사업을.
"2000년쯤 아내의 고향인 중국 옌볜자치구 옌지(延吉)시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북한 사람도 접할 수 있었는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운명적으로 저를 북한으로 이끌었습니다."
―뜻밖의 사실?
"아내의 배경이었습니다. 전에는 아내가 그저 중국 국적을 가진 우리 동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내의 큰아버지는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과 이종사촌지간이었고, 아내도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 동지였던 황순희(조선혁명박물관장)와 친척뻘이었어요. 아내의 사촌오빠인 김영지는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의 묘가 있는 소사하 촌장이었습니다."
―북한 고위층과 혈연이라는 뜻이군요.
"처음엔 그 배경을 활용해 북한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 정도였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죠. 먼저 옌지에 나와 있는 북한 대표부 사람들과 접촉해 아내의 배경을 알리고 면담했습니다. 아내의 신분이 확인되자 일사천리였죠. 며칠 만에 조선노동당 중앙당 통일전선부 초청으로 평양행 기차를 탔습니다. 아내가 '미국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주의를 주던 게 기억납니다."
―평양에서 사업 얘기가 오간 겁니까.
"아닙니다. 처음엔 2박3일 정도 관광 일정이 끝이었죠. 그 뒤로도 종종 옌지와 나선을 오갔습니다. 거긴 경제특구라 외국인 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고 중국인 관광객도 많이 갑니다. 3년 정도 왕래하다 보니 사업 구상이 섰습니다. 관광객 상대 호텔 비즈니스였죠."
―미국인 신분으로 북한에서 사업이 가능한가요.
"3년간 (북한 쪽에) 공을 많이 들였죠. 물론 아내 배경 덕도 많이 봤습니다. 2004년 나선시 인민위원회 주선으로 통일전선부 해외동포사업국과 줄이 닿았습니다. 전 재산 280만달러(약 33억원)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제 명의 단독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 평양에서는 불가능하고 나선시에 회사 설립을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더군요."
양지에서 일하고 음지를 지향하다
본격적인 북한 생활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2004년 나선시에 객실 80개 규모의 '두만강호텔'을 짓고 영업을 시작했다. 매년 110만달러(약 13억원) 안팎의 매출을 올렸는데, 그 중 40만달러(약 4억7000만원)가량은 평양에 상납했다. 12년간 호텔을 운영하면서 얼마나 벌었느냐는 질문에 김 박사는 "번 돈은 없다"고만 했다.
―번 게 없다면서 왜 10년 넘게 사업을…. 혹, 북 정권이 무너진 뒤의 가능성을 본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 와서 보면 호기심과 사명감이 섞여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에 자유시장 경제사상을 불어넣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북한에선 종업원 급여를 모두 지역당 인민위원회에 줘야 합니다. 당에서 주민들에게 배분하죠. 저는 직접 월급을 주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야 종업원들이 당 대신 사장의 말을 듣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두만강호텔을 운영하며 김정일 표창을 세 번이나 받았다면서요.
"북한에서 사업하려면 중앙당의 환심을 사야 하는데 정치나 다른 활동을 할 수 없으니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요. 고가의 독일제 전신 안마기를 수입해 김정일에게 선물로 전달했죠. 그런 선물 공세로 세 번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도덕적 딜레마는 없었습니까. 독재정권에 사업으로 도움을 준 것이란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맞습니다. 북한 체제는 철저히 당 중심이고 주민들은 동물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업과 함께 북한 주민들에게 매달 국수와 빵, 쌀 같은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일도 같이 했습니다. 스파이 활동은 일종의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김 박사는 2006년쯤부터 미국 정보기관(어딘지 밝히진 않았다)의 요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국가정보원과도 접촉했다고 털어놨다. 구체적으로 어떤 협력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주로 사업하면서 접한 북한 고위층 정보, 북한의 핵개발 및 미사일 기지 관련 정보, 북한 수뇌부의 동향, 북한 주민들의 민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고만 했다. 미국이 제공한 손목시계 모양의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한 가지 일화를 공개했는데 2006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김 지사가 북한에서 만들던 수퍼노트(미국 달러 위조지폐)를 입수해 국회에서 터뜨리려 했는데, 모종의 루트를 통해 저를 서울로 초청했습니다. 자신이 입수한 수퍼노트가 진짜 북한이 만든 것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물품 대금으로 수퍼노트를 받았다가 된통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얘길 해줬습니다. 김 지사는 국회서 비공개로 증언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못 했습니다. 너무 위험했거든요."
―박사님이 한 일이 결국 미국이나 한국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도 정보지만, 북한 내부에서 제2의 김동철이 등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라도 그 체제의 폭력성을 깨닫고 그걸 끝내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박사님의 행보가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전혀. 저는 미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회주의자일 수 있을까요."
본격적인 북한 생활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2004년 나선시에 객실 80개 규모의 '두만강호텔'을 짓고 영업을 시작했다. 매년 110만달러(약 13억원) 안팎의 매출을 올렸는데, 그 중 40만달러(약 4억7000만원)가량은 평양에 상납했다. 12년간 호텔을 운영하면서 얼마나 벌었느냐는 질문에 김 박사는 "번 돈은 없다"고만 했다.
―번 게 없다면서 왜 10년 넘게 사업을…. 혹, 북 정권이 무너진 뒤의 가능성을 본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 와서 보면 호기심과 사명감이 섞여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에 자유시장 경제사상을 불어넣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북한에선 종업원 급여를 모두 지역당 인민위원회에 줘야 합니다. 당에서 주민들에게 배분하죠. 저는 직접 월급을 주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야 종업원들이 당 대신 사장의 말을 듣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두만강호텔을 운영하며 김정일 표창을 세 번이나 받았다면서요.
"북한에서 사업하려면 중앙당의 환심을 사야 하는데 정치나 다른 활동을 할 수 없으니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요. 고가의 독일제 전신 안마기를 수입해 김정일에게 선물로 전달했죠. 그런 선물 공세로 세 번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도덕적 딜레마는 없었습니까. 독재정권에 사업으로 도움을 준 것이란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맞습니다. 북한 체제는 철저히 당 중심이고 주민들은 동물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업과 함께 북한 주민들에게 매달 국수와 빵, 쌀 같은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일도 같이 했습니다. 스파이 활동은 일종의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김 박사는 2006년쯤부터 미국 정보기관(어딘지 밝히진 않았다)의 요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국가정보원과도 접촉했다고 털어놨다. 구체적으로 어떤 협력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주로 사업하면서 접한 북한 고위층 정보, 북한의 핵개발 및 미사일 기지 관련 정보, 북한 수뇌부의 동향, 북한 주민들의 민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고만 했다. 미국이 제공한 손목시계 모양의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한 가지 일화를 공개했는데 2006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김 지사가 북한에서 만들던 수퍼노트(미국 달러 위조지폐)를 입수해 국회에서 터뜨리려 했는데, 모종의 루트를 통해 저를 서울로 초청했습니다. 자신이 입수한 수퍼노트가 진짜 북한이 만든 것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물품 대금으로 수퍼노트를 받았다가 된통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얘길 해줬습니다. 김 지사는 국회서 비공개로 증언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못 했습니다. 너무 위험했거든요."
―박사님이 한 일이 결국 미국이나 한국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도 정보지만, 북한 내부에서 제2의 김동철이 등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라도 그 체제의 폭력성을 깨닫고 그걸 끝내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박사님의 행보가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전혀. 저는 미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회주의자일 수 있을까요."
세 번의 협상 끝에 극적인 석방
그리고 2015년 10월 2일이 왔다. 그날 김 박사는 나선시 인민위원회의 면담 요청을 받고 갔다가 "함정에 빠졌다"고 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자신의 비밀정보원을 우연히 만났는데 자신에게 다짜고짜 USB와 사진이 담긴 노란 봉투를 건네며 "회장님이 원하던 자료"라고 말하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직후 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그를 연행해갔다.
―박사님 말로 판단해보면 사실상 숙청이나 다름없는데,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저로선 알 길이 없죠. 다만 2015년에 아내의 배경이었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숙청당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CNN 인터뷰에선 북한으로부터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는데요.
"취조 과정에서 구타는 쇄골이나 명치같이 상처가 안 남는 급소 위주였습니다. 물고문도 당했습니다. 제게 씌워진 죄명이 간첩죄에 최고존엄(김정은) 모독죄 등 13개였는데 예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죠. 최고재판소에서 노동교화형 10년으로 감형됐습니다. 김정일 표창을 세 번이나 받았고, 제가 미국 국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용 가치가 있었던 거겠죠."
―CNN 기자를 불러 인터뷰를 시킨 것 말이군요. 북한은 일종의 대미 협상용 카드로 김 박사님을 활용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인터뷰가 나간 지 1년쯤 뒤에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가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미국의 부탁을 받고 왔다면서 여권과 사회보장번호를 확인하고 갔습니다. 며칠 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조셉 윤이 찾아왔습니다. '돌아가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더군요. 조국이 저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2년 넘게 붙잡혀 있다가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석방됐습니다. 미국이 선생님의 석방에 뛰어든 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국무부 이연향 국장(미·북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 통역)이 '정부가 당신을 석방시키기 위해 두 번이나 물밑 협상을 했는데 실패했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나서 세 번째 시도를 한 끝에 성공했다'고 말해줬습니다. 미국은 위험에 처한 자국민을 잊지 않습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비행기에 들어갔죠. 뭐라고 하던가요.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공항에서 병원에 이송되어 몸을 추슬렀죠. 지난달 석방 후 처음으로 옌지시에 가 봤습니다. 북의 제 회사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려고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더군요. 호텔과 제 모든 재산을 북한이 가져가 버렸습니다."
―박사님은 북한에서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해 본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 15년의 시간이 준 교훈은.
"교훈이라…. 솔직히 말해 제가 간첩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았다면 북한에서 철밥통으로 살았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전 그 체제에서 열외가 된 사람이지만, 덕분에 북한 독재의 실상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겁니다. 이젠 (북한 정권을)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단 절박감이 생겼습니다."
김 박사는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기회가 올 때 주저 없이 경계를 넘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 대신 미국을, 가능성이 보일 때면 독재 정권의 연줄도 이용했다. 조국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다지만 끝까지 사업을 놓은 건 아니었다. 이념과 민족, 권력 같은 거대 담론의 충돌이 빚은 회색지대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인 셈이다. 그는 앞으로 "북한 정권의 실상을 한국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 안보단체 강연, 청소년 대상 안보 교육 등 활동에 매진하겠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다시 줄에 오르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줄에서 완전히 내려왔다는 의미일까. 인터뷰를 마친 김 박사는 지하철을 타겠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광화문광장 일대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야만성을 규탄하는 태극기 부대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시위대 인파 사이로, 김 박사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2015년 10월 2일이 왔다. 그날 김 박사는 나선시 인민위원회의 면담 요청을 받고 갔다가 "함정에 빠졌다"고 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자신의 비밀정보원을 우연히 만났는데 자신에게 다짜고짜 USB와 사진이 담긴 노란 봉투를 건네며 "회장님이 원하던 자료"라고 말하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직후 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그를 연행해갔다.
―박사님 말로 판단해보면 사실상 숙청이나 다름없는데,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저로선 알 길이 없죠. 다만 2015년에 아내의 배경이었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숙청당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CNN 인터뷰에선 북한으로부터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는데요.
"취조 과정에서 구타는 쇄골이나 명치같이 상처가 안 남는 급소 위주였습니다. 물고문도 당했습니다. 제게 씌워진 죄명이 간첩죄에 최고존엄(김정은) 모독죄 등 13개였는데 예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죠. 최고재판소에서 노동교화형 10년으로 감형됐습니다. 김정일 표창을 세 번이나 받았고, 제가 미국 국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용 가치가 있었던 거겠죠."
―CNN 기자를 불러 인터뷰를 시킨 것 말이군요. 북한은 일종의 대미 협상용 카드로 김 박사님을 활용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인터뷰가 나간 지 1년쯤 뒤에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가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미국의 부탁을 받고 왔다면서 여권과 사회보장번호를 확인하고 갔습니다. 며칠 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조셉 윤이 찾아왔습니다. '돌아가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더군요. 조국이 저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2년 넘게 붙잡혀 있다가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석방됐습니다. 미국이 선생님의 석방에 뛰어든 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국무부 이연향 국장(미·북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 통역)이 '정부가 당신을 석방시키기 위해 두 번이나 물밑 협상을 했는데 실패했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나서 세 번째 시도를 한 끝에 성공했다'고 말해줬습니다. 미국은 위험에 처한 자국민을 잊지 않습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비행기에 들어갔죠. 뭐라고 하던가요.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공항에서 병원에 이송되어 몸을 추슬렀죠. 지난달 석방 후 처음으로 옌지시에 가 봤습니다. 북의 제 회사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려고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더군요. 호텔과 제 모든 재산을 북한이 가져가 버렸습니다."
―박사님은 북한에서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해 본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 15년의 시간이 준 교훈은.
"교훈이라…. 솔직히 말해 제가 간첩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았다면 북한에서 철밥통으로 살았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전 그 체제에서 열외가 된 사람이지만, 덕분에 북한 독재의 실상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겁니다. 이젠 (북한 정권을)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단 절박감이 생겼습니다."
김 박사는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기회가 올 때 주저 없이 경계를 넘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 대신 미국을, 가능성이 보일 때면 독재 정권의 연줄도 이용했다. 조국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다지만 끝까지 사업을 놓은 건 아니었다. 이념과 민족, 권력 같은 거대 담론의 충돌이 빚은 회색지대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인 셈이다. 그는 앞으로 "북한 정권의 실상을 한국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다시 줄에 오르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줄에서 완전히 내려왔다는 의미일까. 인터뷰를 마친 김 박사는 지하철을 타겠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광화문광장 일대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야만성을 규탄하는 태극기 부대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시위대 인파 사이로, 김 박사가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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