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사부인(月沙夫人)
月 : 달 월. 沙 : 모래 사. 夫 :지아비 부. 人 : 사람 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대감(大監)의 부인(夫人)을 이르는 말로, 남편(男便)의 지위(地位)가
높은데도 검소(儉素)해서 타(他)의 모범(模範)이 되는 부인(夫人)을 이른다. 出典 : 海東名臣錄>
조선(朝鮮) 제14대 선조(宣祖)의 첫째 공주(公主)인 정명공주(貞明公主)(1603~1685)댁(宅)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잔치가 벌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대갓집 부인(夫人)들이 저마다 권세(權勢)와 호화(豪華)스러움을 자랑하려고 많은 하인(下人)들을 거느리고,
갖은 패물(佩物)과 의상(衣裳)을 갖추고서 아침 일찍부터 정명공주(貞明公主)댁으로 모여들었다.
“과연(果然) 공주(公主) 宅의 잔치라서 다르구먼! 장관(壯觀)이야! 저것 좀 보아,
들어가는 부인(夫人)들마다 모두 눈이 부시잖아!”
사람들은 그 호화(豪華)로움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여보게! 이번행차(行次)는 어느 댁 부인인가?”
“글세, 아직 뉘 댁인가는 모르겠네마는 점점 갈수록 태산(泰山)이구먼! 얼마나 더 호사(豪奢)스러워
지는지 자세히 좀 보세 그려!”
그런데 잠시 후 아주 단출한 가마 하나가 당도 했다.
그리고 가마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가는 여인(女人)은 뜻밖에도 나이가 지긋한 부인(夫人)으로 차림이 소탈(疎脫)했다.
“어허, 저 늙은이가 누구기에 저렇게 수수한 차림일까?”
“필시(必是) 어느 양반(兩班) 댁의 하인(下人)일 거야.”
“예끼, 이 사람아! 가마타고 다니는 下人도 있나?”
“있을 수 있지. 중요(重要)한 심부름이면 주인댁(主人宅) 가마를 탈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럴까? 허기야 지금까지는 저렇게 초라한 행색(行色)의 부인(夫人)이 공주(公主) 댁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니까...”
老夫人은 수수한 무명옷에 별다른 몸치장(治粧)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육간대청(六間大廳)에서 요란스런 치마를 끌면서 호기(豪氣)를 떨던 부인들은 보잘 것 없는
노부인(老夫人)이 대문(大門)으로 들어서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네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여념(餘念)이 없었다.
그런데 그 노부인(老夫人)이 섬돌위에 오르자 주인(主人)인 공주(公主)가 크게 반기면서 맨발로 뛰어 내려와서
영접(迎接)을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다른 부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수군거렸다.
“어느 집 노파(老婆)인데 공주(公主)께서 맨발로 내려와 맞으실까?”
“공주마마도 체통(體統)을 차리셔야지, 우리가 들어올 때는 대청(大廳)에도 안 나오시던 분이
저게 무슨 체모(體貌) 없으신 행동(行動)이람?”
“그렇고 말구요, 公主라는 신분(身分)도 생각하셔야지 원 딱하기도 하셔라. 맨발로 저게 무슨 꼴이실까?”
그러나 공주(公主)는 호사가(好事家)들의 입방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노부인(老夫人)을 윗자리에 모시고
극진(極盡)한 예의(禮儀)로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하는 것이었다.
“오늘 이처럼 어려운 출타(出他)를 하셨는데 飮食이 구미(口味)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많이 드시지요.”
“천만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평시(平時)에는 별로 나다니지 않았습니다만 공주마마 댁 경사(慶事)에야
어찌 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여 오기는 했지만 너무나 융숭(隆崇)한 대접(待接)에 놀랄 뿐입니다.”
노부인(老夫人)이 겸손(謙遜)하게 사례(謝禮)했다.
멀리 앉아서 그 夫人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깔보던 다른 젊은 부인들은 공연(公然)히 입을 삐쭉거렸다.
융숭(隆崇)한 待接을 받고난 노부인(老夫人)은 잠시 公主와 담소(談笑)를 즐기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오늘 너무 큰 환대(歡待)를 받았습니다.”公主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아직 해가 높다란데 왜 벌서 일어서세요? 더 노시다 가시지 않고...”
노부인(老夫人)이 고마움을 치사(致謝)하면서 말 했다.
“우리 집 도제조(都提調)(승문원•사역원 등 관청의 정일품 벼슬)대감(大監)께서 새벽에 궐내(闕內)로 들어가셨고,
이조판서(吏曹判書) 큰 아들이 정사(政事)로 나갔으며, 둘째 아들이 승지(承旨)로 있는 것은 공주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삼부자(三父子)가 상감마마를 모시고 있는 까닭에 이 늙은이가 빨리 돌아가야만
저녁식사를 마련하여 대궐(大闕) 안으로 보내게 된답니다. 하오니 이만 하직(下直)을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옷차림이 수수하여 어느 미관말직(微官末職)의 老母이거나 심부름 온 아녀자쯤으로 여기고 업신여기기까지
하던 젊은 부인들은 노부인(老夫人)의 뜻밖의 말에 그만 몸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右往左往)했다.
“그로고 보니, 저 夫人이 바로 그 月沙 이정귀(李廷龜) 大監의 夫人이셨구나. 남 옷차림이 너무 소탈(疎脫)해서
어느 미관(微官)의 노모(老母)인줄로만 알았지 뭐야.”
“나도 몰랐네. 그런 줄 알았더라면 인사(人事)라도 올려 둘 것을...”
월사부인(月沙夫人)이 돌아가자 젊은 夫人들은 자기네의 지나쳤던 호사(豪奢)를 뉘우쳤다.
월사(月沙)는 명(明)나라 경약(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요청(要請)으로 경서(經書)를
강의(講義)할 정도(程度)로 박식(博識)한 학자(學者)였다.
그는 촉(蜀)나라 태수(太守)가 죽자 아래와 같이 그의 비문(碑文)을 써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충성(忠誠)으로 죽고, 또 아들은 효도(孝道)를 다하여 죽으니.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었도다.’
비문(碑文)을 본 촉(蜀)나라 사람들이 크게 감동(感動)하여 사례(射禮)로 비단 한 수레와 황금(黃金) 백(百)냥을 주었다.
이 소문(所聞)이 국내(國內)에까지 퍼지자 나라 안의 칭송(稱頌)이 자자했다.
그의 이런 행적(行蹟)에는 보이지 않게 뒤에서 내조(內助)한 그의 부인(夫人)의 공(功)이 컸다.
그래서 월사부인(月沙夫人)의 공(功)이 월사(月沙)를 만들었다는 말로 월사부인(月沙夫人)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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