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시시각각] ‘공론화’가 망하는 길
편견 끼면 집단지성이 집단광기로 변해
전문가의 영역은 공론화 적용해선 곤란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에 집단지성이란 화두가 유행한 건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였다.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괴담에 홀린 수십만 명이 촛불을 들고 쏟아져 나오자 일부에선 “집단지성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했다. 한 진보 매체는 “학자들이 촛불집회 참여자들이 보여준 정보 분석, 상황 판단, 행동 결정 등의 과정에서 ‘집단지성’의 실체를 발견했다”고 썼다.
외국 사례도 숱하다. 지난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브렉시트(Brexit)도 집단무지의 끝판이다. 영국인들이 숙고 끝에 판단했다면 그 결정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국민투표 후에야 “브렉시트가 뭔가” “브렉시트가 영국에 끼치는 영향은” 등등 한심한 질문이 인터넷에 쏟아졌다. 뭔지도 모르면서 투표했다는 얘기다. 뒤늦게 심각성을 알았는지 지난달 조사에서는 여론이 역전돼 “EU에 남아야 한다”는 응답이 52%를 기록, 국제적 웃음거리가 됐다.
황소 몸무게 맞히기 때 통했다고 추정치 평균을 진실로 믿어선 안 된다. 2011년 스위스에서 여럿을 상대로 각국 범죄율을 맞히는 실험을 했다. 황소 때와 달랐던 건 서로 의논할 수 있게 했다. 그랬더니 개별 편차는 줄지만, 평균이 정답과 크게 다를 때가 많았다. 소통하면 이견은 감소하나 집단적 편견 위험은 커진다는 의미다. 2008년 쇠고기 파동 때의 현상이 딱 이거였다.
한 집단에 편견에 빠진 여럿이 들어와 자신들의 주장을 집요하게 펴면 합리적 인물도 쉽게 끌려간다. 선동가에 의해 집단지성이 악성(惡性) 집단사고로 변질되는 케이스다. 이 또한 경계 대상이다.
지난번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놓고 실시됐던 공론화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국회가 제 구실을 못해 국민이 나서는 것 아니냐는 주장엔 반박할 말이 궁색하다.
다만 집단지성이 제대로 발휘돼 공론화가 성공하려면 갖춰져야 할 조건들이 있다. 첫째, 각 개인이 독립적으로 사고할 것. 둘째, 이들이 문제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할 것. 끝으로 다양한 이들을 참여시킬 것 등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론화 참가자들이 선동가에게 휘둘리거나 편견에 빠질 위험이 크다.
외국의 공론화 성공 사례도 여기에 맞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미 뉴올리언스 복구사업을 보자. 뉴올리언스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입은 피해를 수습하면서 공론화를 통해 무엇부터 복구할지 결정했다. 병원·학교·어린이놀이터 등 어디부터 손 댈지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공론화 참가자인 주민들이 무엇이 가장 절실한지 판별할 능력이 충분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사안은 다르다. 사전 지식 없이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판단하기 어려운 게 보통이다. 정부가 다음에 공론화할 걸로 보이는 사용후 핵연료 처리도 문외한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앞으로 공론화를 계속 활용한다 해도 적용할 곳과 그래선 안 될 경우를 구분할 선구안이 필요하다. 조자룡 헌 칼 쓰듯 공론화를 남발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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