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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출동 늦었다고,,사람 못 살렸다고 119에 억대 소송

[단독]출동 늦었다고, 사람 못 살렸다고 119에 억대 소송

윤여진 입력 2017.10.27. 07:44 수정 2017.10.27. 08:14

바닷물까지 끌어 선박에 난 불 껐는데 늦게 왔다고 1억 대 손배소
구조 장비 없는 구급대 보고 고속도로 위서 구조 안 했다고 2억 대 손배소
소방청 실태조사 2012년 이후 민형사상 소송 13건·약 22억원
재판 대신 행정심판으로 갈음하는 소방기본법 1년째 '낮잠'
소방대원들이 불이 난 3층 주택에 사다리를 통해 진입해 화재 진압 작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이데일리 윤여진 기자] 2011년 7월 5일 새벽 충남 태안소방서 상황실에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항구에 정박한 선박에 불이 났다’는 선주의 화재 신고였다. 당시 태안 앞바다엔 해상주의보가 내려진 탓에 태안군 이원면 내리 만대항엔 어선 18척이 정박해 있었다. 펌프차 3대와 물탱크차 5대 등 화재진압 차량을 포함한 12대가 신고 39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만대항과 태안소방서와의 거리가 29.39km나 됐던 탓이다. 그나마 새벽이어서 40분이 안걸려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당시 선박 7척은 이미 완전히 불에 탔고 2척은 절반 정도 소실돼 있었다. 태안소방서 전 자원을 동원한 덕에 나머지 9척에 불이 옮겨붙는 사태를 막아낼 수 있었다. 주변에 소화전이 없어 바닷물까지 끌어서 쓴 덕에 가까스로 추가 피해를 막아냈다.

그러나 화재로 배를 잃은 선주 7명은 이듬해 9월 태안소방서를 관할하는 충청남도와 태안군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선주들은 소방대가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1억 4000만원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 2014년 10월 1심 판결에서 전부 패소했다.

2012년 4월 16일 오전 울산 울주군 경부고속도로 온양 IC 부근에서 6중 추돌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한국도로공사는 고속도로 2차선 일부 구간에서 도로 공사가 진행했다. 2차로에서 운전 중이던 화물트럭이 1차로로 진입하다 앞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 것이다. 추돌 10분 만에 차량 화재로 번졌다.

화재 신고를 접수한 울산소방본부 상황실은 울산 중부소방서와 울산 남부소방서에 모두 출동을 명령했다. 사고 차선 반대 방향에서 출발한 남부소방서 구급대가 현장에 먼저 도착했다. 하지만 1.3m의 높이의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를 넘어 반대 방향 차선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급대원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중앙분리대를 넘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시속 80km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차량 사이를 뚫고 지나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남부소방서 대원들이 발을 구르는 사이 다행히 사고 차선 방향에 중부소방서에서 출동한 펌프차 등 화재진압 차량과 구조대 차량, 소방헬기까지 도착했다. 어렵게 화재를 진압하고 사상자를 수습했지만 이들도 고소를 당했다.

이듬해 교통사고 사망자 측 한 대형 보험사는 울산소방본부를 관할하는 울산시장을 상대로 1억 4250만원을 배상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남부소방서에서 먼저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부상자를 실어 나르지 않아 피보험인이 사망했다는 이유에서다. 남부소방서 측 변호사는 구급대원이 설령 위험을 무릅쓰고 중앙분리대를 넘어갔다고 해도 구조장비가 없어 응급조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론했다. 또한 사망 시점은 교통사고 직후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를 제출했다. 보험사는 2013년 11월 7일 1심에서 패소했다.

◇ 야근하고 재판 출석…“법무 인력 없어 업무 가중”

위 사례와 같이 소방대원들이 늦게 도착했다거나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현행 소방법상 정당한 소방활동과정에서 발생한 물적·인적 피해에 대해서는 각 소방본부가 소속된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을 지게 돼 있다. 문제는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당사자인 대원들이 고의·과실로 인해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본업을 제쳐두고 뛰어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는 게 일선 소방대원들의 하소연이다.

25년 경력의 베테랑인 A소방위는 3년 전 소송에 휘말려 1년 6개월 동안 총 9차례 법정에 출석해야 했다. 피고는 도지사였지만 현장에 현장지휘팀으로 출동한 그가 소송실무를 맡아야 했다. A소방위는 “야간 근무를 끝내고 잠깐 눈만 붙였다가 다음날 낮에는 재판에 출석해야 했다”며 “본부 차원에서는 법무담당관이 1명 있지만 일선서에는 전담 인력이 부재해 업무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고 돌이켰다.

서울소방학교 겸임교수 겸 대한변협 소방관법률지원단 소속인 선문종(42) 변호사는 “보험사는 소방대원이 지급 능력이 없는 걸 알기 때문에 시도지사 상대로 소송을 걸고 보험사가 승소하게 될 시 시도는 다시 해당 소방관한테 구상금을 청구한다”고 설명했다.

◇ 2012년 이후 13건 제소 당해…청구액 22억 2124만원

소방청이 17개 각 시도 소방재난본부를 통해 지난 2012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화재진압·구조 등 소방활동을 이유로 소송에 휘말린 사례를 취합한 결과 소송 건수는 총 13건, 손해배상·구상금 청구액은 22억 2124만원으로 나타났다. 손해배상금과 구상금 청구 수는 6건으로 같았다. 평균 소송 가액은 손해배상이 9303만 4549원, 구상금 청구가 2억 7717만원이다.

지역본부별로는 경기가 5건으로 제일 많았고 충남(4건), 울산(2건), 인천·울산·경남(1건) 등의 순이었다. 13건 중 12건이 민사소송이었고 형사소송은 한 건이다. 이중 8개 소송은 확정판결이 났고 5개 소송은 재판이 진행 중이다.

확정판결 8건 중 일부 승소까지 포함해 보험사나 유족 등 원고 승소는 2건이다. 원고가 패소한 사건들 중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무리한 소송이 적지 않다.

충남 한 소방서는 창고 안 벼 건조기 모터에 불꽃이 튀어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화재를 진압했다. 그러나 창고 주인은 소방대원들이 화재 진압과정에서 창고 안에 있던 기름통에 물을 뿌려 피해가 커졌다며 7230만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냈다. 이 사건은 결국 지난 6월 대법원에서 소방서 측이 최종 승소했다.

경기도에서는 화재 사망자 유가족이 소방대원들 구조업무를 소홀히 해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소방공무원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기각했다.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정다툼 없이 행정심판으로 보상이 가능하도록 손실보상심의회 설치를 골자로 한 소방법 개정안을 지난해 9월 발의했지만, 국회의 무관심 탓에 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 조차 통과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소방청 관계자는 “일선 소방대원들이 공무 중에 일으킨 재산상 피해 등이 자신의 중대과실이 아닌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면 소송을 신경 쓰지 않고 본업인 국민의 생명 보호를 위해서 더욱더 집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소방대원들이 화재진압을 위해 불이 나 연기로 자욱한 실내로 진입하고 있다. (사진=서울소방재난본부 제공)

윤여진 (kyle@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