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사회

효순'미선 잘 아시죠?...서해교전 전사자 이름은 아십니까


[Why] 효순·미선 잘 아시죠?… 서해교전 전사자 이름은 아십니까

조선일보
  • 박돈규 기자


    입력 2018.07.07 03:00

    추모의 정치학

    죽은 자를 참배하는 일도 정치다. 작년 대선 기간 중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던 문재인 대통령(가운데 사진)은 최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는 찾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23일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등 북한의 무력도발로 희생된 호국 영령을 기리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오른쪽 사진)에도 해외순방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죽은 자를 참배하는 일도 정치다. 작년 대선 기간 중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던 문재인 대통령(가운데 사진)은 최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는 찾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23일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등 북한의 무력도발로 희생된 호국 영령을 기리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오른쪽 사진)에도 해외순방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 그래픽=이철원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일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백악관 보좌관이 2003년 4월 한국 인사에게 물었다. "2002년 6월 훈련 중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여중생 이름을 아십니까." '효순'과 '미선'이라고 답했다. 추가 질문이 날아왔다. "같은 달 서해 교전(제2 연평해전)으로 사망한 군인들 이름은요?" 쩔쩔맸고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군인 이름은 모르고 사고로 죽은 소녀 이름은 기억한다.

    '죽은 자에 대한 참배'에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감기 몸살로 연차휴가를 이틀 쓰고 지난 2일 청와대로 복귀했다. 지난달 26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6·25 참전 용사 추모식과 29일 평택 2함대에서 열린 제2 연평해전 기념식에 가지 않았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지난해엔 대선 후보로서 파격적으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며 '국민 통합'을 이야기했던 그는 최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지만 조문(弔問)하지는 않았다.

    지난 3월 23일 유가족 등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올해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도 문 대통령은 없었다. 해외 순방 중이었다. 서해 수호의 날은 제2 연평해전과 2010년 천안함 폭침, 같은 해 연평도 피폭 등 북한의 서해 3대 도발로 희생된 호국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북한의 무력 도발을 상기하자는 취지로 2016년 만들었다. 서해 수호의 날 지정 후 군 통수권자가 불참한 것은 처음이다. 첫 기념식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엔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이 다녀갔다.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하지만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국정 지지도가 높을 때는 자신감 있고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큰 틀에서 보면 이 정부가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국에는 진보·보수가 없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기리는 게 마땅하다. 어떨 때는 추모하고 어떨 땐 회피한다면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축소된 제2 연평해전 기념식

    2002년 월드컵 때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지키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 공격을 받고 싸운 제2 연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여섯 용사는 윤영하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박동혁이다. 지난 29일 제2 연평해전 16주기 기념식에 다녀온 유승민 바른미래당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 "한동안 부대 자체 행사로만 치러졌던 추모식이 2015년 제2 연평해전 승전 기념식으로 격상되었다가 올해 다시 부대 자체 행사로 돌아갔다고 한다"며 "씁쓸함이 밀려든다"고 썼다. "조금씩 잊혀 가는 것 같아 여섯 영웅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했다.

    청와대는 이날 제2 연평해전에 대해 아무런 메시지도 내놓지 않았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논평 한 줄 없었다. 15주기였던 작년엔 회의 전에 묵념하고 모두 발언도 제2 연평해전으로 시작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난 4월 남북 정상회담 후 발표된 서해 평화 수역을 비롯해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국방부는 이날 제2 연평해전에 대해 '전사'가 아닌 '순직'이라 표현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과하기도 했다.

    2015년 제2 연평해전 승전 기념식 때 한민구 국방장관이 "우리 장병들이 북한의 도발을 온몸으로 막아낸 승리의 해전이자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추모하자, 북한 대남 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연평해전은 한미 양국이 계획적으로 도발했다. 모든 원점을 단번에 초토화하겠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올해 기념식에 참석한 해군 관계자는 "외부인도 언론사도 거의 없어 지난해에 비해 축소된 느낌을 받았다"며 "표현하지 않아도 유족들 심정이 어떤지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故) 윤영하 소령의 부친 윤두호씨는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진정한 평화가 오면 좋겠다"면서도 "두고 봐야 한다. 북한에 하도 많이 속았으니…"라고 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을 자극하거나 껄끄러운 추모는 짐짓 피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야당에서는 "청와대와 여당에는 광주 5·18과 제주 4·3은 정서적으로 밀접하고 제2 연평해전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며 "적극적 의향이 있었다면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도, 6·25 참전 용사 추모식에도, 제2 연평해전 기념식에도 갔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참배·훈장·조문, 왜 문제인가

    참배가 곧 정치철학이다. 과거에 진보 진영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면 지지층이 떨어져나갔다. 반대로 보수 진영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로 참배 가면 봉변당하기 십상이었다.

    JP가 별세하자 청와대는 "고인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손때와 족적은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조의를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 조문 여부에 대해 이낙연 총리는 "제 견해로는 오실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것이 상식에 가까웠지만 문 대통령은 전례를 핑계로 조문하지 않았다. 진영 논리와 편견에 갇힌 정치 현실이 드러났다.

    2015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이승만·박정희 묘역을 처음으로 참배하며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마다 과(過)가 있지만 공(功)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를 이뤘고, 이 전 대통령은 건국의 공로가 있다"며 "그분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통령이며 함께 모시고 기념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참배를 둘러싼 분열과 갈등은 여전하다.

    2012년 대선 후보 때는 이승만·박정희 묘역을 참배하지 않았다가 이후엔 참배한 게 모순된 행동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죽은 자의 정치학'을 펴낸 하상복 목포대 교수(정치학)는 "정치적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일관성 없이 바뀐 데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라며 "좌파·우파의 이념 대결이 끝나지 않은 마당에 JP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한 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국립묘지는 6·25전쟁 직후 만들어진 국립현충원을 비롯해 4·19민주묘지, 5·18민주묘지 등 8곳에 이른다. 한국인에게는 정치적 긴장이 감도는 두 부류의 국립묘지가 존재하는 셈이다.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는 남북전쟁(1861~65) 당시 북군 전몰 장병들을 위한 묘지로 출발했다가 19세기 말에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겪고 나서 남군 전몰 장병의 유해도 안장하게 됐다. 통합된 미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하 교수는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우리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념 통합과 더불어 그렇게 죽은 자들의 공간도 공유하는 형태로 가야 한다"며 "묘지 통합이 먼저인지 이념 차이를 정리하는 게 먼저인지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국익을 위하는 길이라면 좌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김형준 교수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보수 정치인이지만 진보적인 사람들도 좋아했다.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미 FTA 때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면 JP를 조문했을 것"이라며 "문 대통령이 온정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희생 강요하고 예우 없다면 직무 유기"

    미국 하원은 지난달 27일 6·25 참전 미군 유해 송환을 위해 예산 1000만달러를 국방 예산안에 배정했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현재 6·25 참전 미군 실종자는 약 7700명이고 이 중 5300명의 유해가 북한에 있는 것으로 미 국방부는 추산하고 있다"며 "미북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현재 200여 명의 미군 유해가 송환되는 과정"이라고 보도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6~7일 방북에서 일정한 유해 송환 이벤트를 얻어낼 것이라는 관측이다.

    제2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씨는 "미북 정상회담에서 미군 유해 송환부터 요구한 미국이 부러웠다"며 "전사한 지 60여 년이 지났는데 기억
    하고 찾아오려 하고 예우하는 게 역시 대국(大國)다운 모습"이라고 말했다.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군인을 추모하는 데는 여야도 좌우도 없는데, 우리는 가야 할 자리인지 가지 말아야 할 자리인지 따지는 게 안타깝다"고도 했다. 김형준 교수는 "정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라며 "희생만 강요하고 예우하지 않는다면 직무 유기"라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06/20180706018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