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 1988년 서울, 2018년 평양 그리고 ‘어떤 나라’
외화 벌러 어린 학생 동원하는 ‘빛나는 조국’
악명 높은 인권유린 알고도 “감동” 운운하나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렇게 국가의 강제동원에 치가 떨린다던 사람들이 갑자기 달라졌다. 평양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지난 9월 19일 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기업인을 대동하고 북한의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하면서부터다. 다섯 살 아이를 비롯해 어린 학생 등 10만여 명이 한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도 불편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울컥했다’거나 ‘뭉클했다’며 감동에 겨워한다. 하룻밤 새 뒤바뀐 이 급격한 온도차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1988년 서울은 그토록 끔찍한데 2018년 평양은 이토록 아름답다는 대한민국의 인권 감수성이라니.
심지어 ‘문 대통령이 어린 학생들의 리듬체조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거나 문 대통령과 함께 평양 5·1경기장에서 직접 관람한 가수 에일리와 래퍼 지코가 공연 직후 “감동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무엇이 흐뭇하고 무엇에 감동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방북단의 눈 앞에 펼쳐진 이 집단체조 공연은 이념과 무관하게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유린의 현장 그 자체라는 점이다.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알았다면 결코 흐뭇해하거나 감동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영하 20도가 되는 날에도 우리는 훈련을 합니다. 힘든 훈련을 할 때는 엎어지기도 하고 무릎이 상하기도하고 아픈 데가 많습니다. 장군님(김정일)을 모시고 행사하는 그 날을 그리며 아픈 것도 참고 훈련을 합니다.”(현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피땀을 바치고 있습니다. 경외하는 장군님께 꼭 완성된 동작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송연)
하지만 2003년 9월 9월부터 20일 간 매일 두 차례 공연하는 동안 최고지도자는 끝내 참석하지 않았고, 두 학생은 공연 다음날부터 이듬해 공연을 위해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는 말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는 더 끔찍하다. 훈련 중 기절하는 건 흔하고 급성 맹장을 참고 연습하던 7세 소년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기까지 했다. 북한인권조사위는 국제아동권리협약 위반을 지적하지만 너무 점잖은 표현이다. 그저 아동 학대일 뿐이다.
외부의 시선만 비판적인 게 아니다. 북한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다. 태영호 전 북한공사는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북한 주민에게 제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게 ‘아리랑’을 중지시킨 일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불만이 많지만 차마 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차에 김정은이 학생 동원을 중지시켜 북한 주민들의 박수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리랑’ 중단 5년만인 올해 집단체조가 부활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공연 재개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의 국가관광총국 공식 홈페이지가 밝힌 이 공연의 관람권 가격은 VIP석이 800유로(118만원)이고, 가장 싼 3등석도 100유로(15만원)다.
문 대통령은 관람 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적잖은 국민에겐 문 대통령이 북한과 함께 그리는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일지 오히려 의문이 생기지 않았을까.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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