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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1988년 서울, 2018년 평양 그리고 '어떤 나라'


[안혜리의 시선] 1988년 서울, 2018년 평양 그리고 ‘어떤 나라’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 공연에서 '꿈도 하나 소원도 하나 평화!번영!통일!'이라는 카드섹션이 펼쳐지고 있다. 2018.9.19/평양사진공동취재단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 공연에서 '꿈도 하나 소원도 하나 평화!번영!통일!'이라는 카드섹션이 펼쳐지고 있다. 2018.9.19/평양사진공동취재단

외화 벌러 어린 학생 동원하는 ‘빛나는 조국’
악명 높은 인권유린 알고도 “감동” 운운하나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KBS가 최근 방영한 다큐멘터리 ‘88/18’이 요 며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단연 화제였다. 88올림픽 전후의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룬 이 실험적인 다큐멘터리에 대해 ‘군사독재 부역자 KBS의 자기반성’이라느니 ‘모처럼 느낀 수신료의 가치’라고 찬사를 보내며 그 시절의 한국을 조롱하는 글이 차고 넘쳤다.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한 직후 어느 경기장에 등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 얼굴을 재연한 카드섹션, 개폐막 공연을 위해 운동장에서 체조 연습을 하는 어린 소녀들, 그리고 ‘레슬링협회장’ 명찰을 달고 앉아 있는 젊은 시절 이건희 삼성 회장 등이 나온 장면 하나하나를 복기해가며 국가가 특정한 목적(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을 이루기 위해 개인을 억압하고 기업을 동원하는 모습에 몸서리쳤다. “이게 고작 30년 전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면서.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렇게 국가의 강제동원에 치가 떨린다던 사람들이 갑자기 달라졌다. 평양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지난 9월 19일 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기업인을 대동하고 북한의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하면서부터다. 다섯 살 아이를 비롯해 어린 학생 등 10만여 명이 한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도 불편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울컥했다’거나 ‘뭉클했다’며 감동에 겨워한다. 하룻밤 새 뒤바뀐 이 급격한 온도차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1988년 서울은 그토록 끔찍한데 2018년 평양은 이토록 아름답다는 대한민국의 인권 감수성이라니.
 
심지어 ‘문 대통령이 어린 학생들의 리듬체조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거나 문 대통령과 함께 평양 5·1경기장에서 직접 관람한 가수 에일리와 래퍼 지코가 공연 직후 “감동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무엇이 흐뭇하고 무엇에 감동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방북단의 눈 앞에 펼쳐진 이 집단체조 공연은 이념과 무관하게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유린의 현장 그 자체라는 점이다.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알았다면 결코 흐뭇해하거나 감동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우리 정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런 사실 앞에 애써 눈을 질끈 감지만 지금 당장 유튜브만 찾아봐도 이 집단체조가 얼마나 끔찍한 인권탄압의 결과물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북한 3부작으로 유명한 영국 다큐멘터리 감독 대니얼 고든의 ‘어떤 나라’(2004)는 ‘빛나는 조국’의 전신인 ‘아리랑’ 공연에 참여하는 두 소녀의 연습과정을 통해 북한 주민의 일상을 시종일관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북한의 55번째 전승기념일인 2003년 9·9절 공연을 위해 13살 현순이와 11살 송연이는 추위가 채 가시기 전인 2월부터 이미 훈련을 하고 있다. 공연이 10주 앞으로 다가오자 햇볕이 쨍쨍한 와중에도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야외에서 훈련한다. 아직 어린 나이,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겉으론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이 혹독한 훈련을 견딘다.
 
“영하 20도가 되는 날에도 우리는 훈련을 합니다. 힘든 훈련을 할 때는 엎어지기도 하고 무릎이 상하기도하고 아픈 데가 많습니다. 장군님(김정일)을 모시고 행사하는 그 날을 그리며 아픈 것도 참고 훈련을 합니다.”(현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피땀을 바치고 있습니다. 경외하는 장군님께 꼭 완성된 동작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송연)
 
하지만 2003년 9월 9월부터 20일 간 매일 두 차례 공연하는 동안 최고지도자는 끝내 참석하지 않았고, 두 학생은 공연 다음날부터 이듬해 공연을 위해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는 말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는 더 끔찍하다. 훈련 중 기절하는 건 흔하고 급성 맹장을 참고 연습하던 7세 소년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기까지 했다. 북한인권조사위는 국제아동권리협약 위반을 지적하지만 너무 점잖은 표현이다. 그저 아동 학대일 뿐이다.
 

외부의 시선만 비판적인 게 아니다. 북한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다. 태영호 전 북한공사는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북한 주민에게 제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게 ‘아리랑’을 중지시킨 일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불만이 많지만 차마 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차에 김정은이 학생 동원을 중지시켜 북한 주민들의 박수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리랑’ 중단 5년만인 올해 집단체조가 부활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공연 재개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의 국가관광총국 공식 홈페이지가 밝힌 이 공연의 관람권 가격은 VIP석이 800유로(118만원)이고, 가장 싼 3등석도 100유로(15만원)다.
 
문 대통령은 관람 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적잖은 국민에겐 문 대통령이 북한과 함께 그리는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일지 오히려 의문이 생기지 않았을까.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