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준의 의학노트] 아홉 살 소녀에게 무릎 꿇은 가짜 의학
아홉 살짜리 에밀리가 연구를 시작한 배경은 이렇다. 당시 미국에선 ‘접촉 치료’라는 것이 꽤 인기가 있었다. 이 치료는 모든 사람에게 ‘에너지장’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접촉 치료사들은 환자의 에너지장 교정을 통해 수많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에게 ‘에너지장’이 있다는 것도 쉽게 믿기 어렵지만, 치료사가 환자를 만지지도 않은 채 자신의 두 손바닥으로 환자의 에너지장을 변화시켜 두통, 관절염, 자폐증, 천식은 물론 알츠하이머병, 발작, 뇌경색까지 호전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선뜻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런데 접촉 치료사들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나선 것은 고명한 의학자들이 아니라, 간호사인 엄마에게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들은 에밀리였다. 학교 과학 전시회를 준비하던 이 소녀는 접촉 치료사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보는 것을 주제로 삼기로 결정한다. 에밀리가 계획한 검증 방법은 간단했다. 치료사와 에밀리 사이에 막을 친 다음, 눈을 감고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여 양손을 벌린 치료사가 에밀리의 손이 오른쪽에 있는지 왼쪽에 있는지 맞출 수 있는지 확인하기로 한 것이다. 접촉 치료사들이 에너지장을 감지하고 교정할 수 있다면 당연히 에밀리의 손이 어느 쪽에 있는지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에밀리는 동전을 던져 어느 쪽으로 자신의 손을 옮길 것인지를 정했고, 한 치료사에게 열 번씩 반복하여 손의 위치를 맞추게 했다. 정답은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답해도 다섯 번 정도는 맞추게 된다.
흔쾌히 이 연구에 참여했던 접촉 치료사 15명이 에밀리 손의 위치를 맞춘 횟수는 10회의 시험 중 평균 4.67회로 다섯 번에도 미치지 못했고, 이로써 에너지장을 인식하여 치료한다는 접촉 치료사들의 주장은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상당한 횟수를 맞춘 사람은 없었을까? 있었다. 한 명이 10회 중 8회를 정확하게 가려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다시 시행한 시험에서는 겨우 6회만을 맞추는 데 그쳐 첫 번째 검사 결과는 우연이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연구를 마친 에밀리는 이 결과를 학교 과학 전시회에 내걸었고, 이 독특한 연구에 대한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한 방송국에서 에밀리에게 자신들이 녹화하는 가운데 다시 한번 시행해보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여 다시 검증 과정을 반복한다. 사실상 접촉 치료법의 미래가 달려 있던 두 번째 검증에는 13명의 치료사가 참여했다. 이들이 올바르게 답한 횟수는 몇 회였을까? 이번에는 평균 4.08회로 정답률이 처음보다 더 낮았다.
결국 에밀리의 연구는 몇 년 후 미의사협회지에 출판되었다. 내로라하는 의학자들도 자신의 논문을 쉽게 싣지 못하는 학술지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의 과학 전시회 출품작이 출판되었으니 반향도 컸지만,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미의사협회지의 편집장이었던 조지 룬드버그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비판을 일축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과학인지 여부이며, 이 연구는 좋은 과학임이 분명하다”
접촉 치료법은 아홉 살 소녀 에밀리가 구현한 과학에게 완패하는 바람에 설 자리를 잃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근거가 부족하지만 만병통치를 주장하는 수상한 치료법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린 소녀에게도 완패 당하는 가짜 의학일 뿐이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끝없는 자기 검열을 통해 꾸준히 진보해 온 현대 의학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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