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과학] 라면, 치킨과 튀김 방식 달라… 국수보다 저칼로리
입력 2018.12.01 10:00
“라면 먹을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에게 툭 던진 이 말로 둘은 연인이 된다. 영화 ‘우아한 세계’ 속 기러기 아빠 인구(송강호)는 가족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며 라면을 먹다 그릇을 집어 던진다. 영화 ‘파송송 계란탁’의 대규(임창정)는 인권(이인성)과 함께 라면을 요리하며 부자간의 정을 키운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서민의 동반자’인 라면이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런데도 라면을 둘러싼 오해는 여전하다. 라면으로 한 끼 때우는 동료를 보면 괜히 측은하고, 몸무게를 떠올리면 라면 먹을까 말까 고민된다. 엄마는 아이에게 라면 끓여주면서 살짝 미안해진다. 그럴 필요까지 없다. 라면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과학적인 식품이다.
◇기름 많아서 살찐다?라면을 자주 먹으면 살찐다고들 걱정한다. 제조 과정에서 면을 기름에 튀긴다는 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밀가루와 전분 등의 원료를 섞은(혼합) 다음 압축해서 늘리고(압연) 칼로 적당한 크기에 맞춰 잘린(절출) 면은 뜨거운 증기에서 익은(증숙) 뒤 1분 30초~2분가량 150도 정도의 기름에 담긴다(유탕). 그러면 면에서 수분이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지방이 스며든다(치환). 이를 60도 이하로 식혀 포장한 게 우리가 흔히 먹는 라면(유탕면)이다.
튀긴다고 하면 치킨 가게나 패스트푸드점처럼 커다란 용기에 다량의 기름을 붓고 일정량을 튀긴 다음 기름을 갈아준다(배치식)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라면 제조 공정에는 대개 배치식이 아닌 연속식 공정이 적용된다. 봉지 1개 분량으로 잘린 라면이 차례로 용기에 담기면 계속해서 신선한 기름이 공급되는 방식이다.
모든 라면이 유탕면은 아니다. 건면은 기름 대신 100도가 넘는 뜨거운 바람을 가해 수분을 날린다(열풍건조). 수분이 있던 자리가 기름으로 채워지지 않으니 건면은 열풍건조 후 부피가 0.8~0.9배로 줄어든다. 기름에 튀긴 후 원래 부피보다 1.5~2배 팽창하는 유탕면과 정반대다. 이런 특성 때문에 유탕면과 건면은 내부 조직 구조와 식감이 전혀 다르다. 조직이 엉성해 국물이 면 속으로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유탕면은 식감이 부드러운 반면, 질깃하고 단단한 구조인 건면은 씹었을 때 상대적으로 쫄깃하고 차지다. 이런 식감 차이는 원료 혼합 과정에서도 가미된다. 유탕면과 달리 건면은 진공 상태에서 원료를 섞는다. 공기가 없으면 섞인 반죽이 더 차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기름에 튀겨 만든 유탕면이라도 열량은 봉지라면 1개 기준 500킬로칼로리(㎉) 안팎으로 자장면(약 800㎉)이나 잔치국수(650㎉), 물냉면(600㎉) 같은 일반적인 외식 면류에 비해 낮은 편이다. 건면 라면은 대부분 350㎉ 미만으로 더 낮다.
◇라면이 다 거기서 거기?라면은 종류별로 수프 맛이 다를 뿐 면 자체엔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라면을 끓이기 전 단단한 상태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맨눈으로도 차이가 보인다. 예를 들어 유탕면과 건면의 단면에서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조직의 치밀도다. 둘의 단면을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유탕면은 마치 스폰지처럼 엉성한 다공질인 반면 건면은 구멍이 거의 없이 치밀하다. 혼합과 수분 제거 방법에 따라 내부 조직 구조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라면 제품은 건면인데도 내부가 다공질인 경우가 있다. 면의 원료를 혼합할 때 효모 가루를 함께 넣고 숙성시킨 다음 압연, 절출 등 이후 공정을 진행하면 독특한 ‘다공질 건면’이 만들어진다. 제빵 공정의 발효 숙성 원리를 적용해 면을 빵처럼 부풀리는 것이다. 물론 효모의 배합 비율이나 발효 시간 등은 제면과 제빵 공정이 전혀 다르다. 다공질 건면은 기름기가 적어 맛이 깔끔하면서도 유탕면과 비슷한 부드러운 식감을 낼 수 있다.
최근 출시된 인스턴트 스파게티 라면은 이와는 또 다른 ‘사출식’ 건면이다. 단백질 함량이 높은 밀가루를 혼합한 반죽을 스크루처럼 생긴 기계에서 밀어내(사출) 만든다. 수증기를 이용한 일반적인 증숙이 면을 열로만 익힌다면, 스크루는 회전할 때 면 반죽에 마찰 압력과 열을 동시에 가해 익히는 것이다. 익은 면 반죽을 가느다란 구멍을 통해 대기압 상태로 뽑아내면 순간적인 압력 차이 때문에 면이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고압과 저압을 차례로 거쳐 나온 면은 식감이 스파게티처럼 쫄깃해진다.
절출 공정에 쓰이는 칼을 변형해 다양한 모양의 라면을 개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운데가 도톰하고 가장자리는 얇게 잘라내 단면이 마름모꼴인 라면은 이중 식감을 낼 수 있다. 가운데 부분은 쫄깃하고 가장자리는 야들야들하다. 톱니바퀴처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하게 만드는 굴곡면이나 빨대처럼 가운데를 뚫은 중공면은 접촉 면적이 넓어져 국물이 면 속으로 빨리 스며든다.
◇라면 수프 몸에 안 좋다?그래도 역시 라면 맛은 수프가 가장 많이 좌우한다. 라면 1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수프 원재료는 50여 가지나 된다. 원재료를 모아 푹 끓여낸 국물을 건조해 가루나 액상으로 만든 다음 알맞은 비율로 섞어 밀봉한 게 바로 수프다. 이 과정에서 모든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어떻게 보존하느냐가 라면 업계의 최대 관심 기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프 제조의 시작은 가정에서 국을 끓이는 방법과 비슷하다. 신선한 채소와 육류 등을 물에 넣고 오랜 시간 가열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국을 끓일 때 맛과 향을 붙잡기 위해 냄비 뚜껑을 닫고 가열하는 것처럼 라면 수프 원재료도 밀폐된 용기에서 고아낸다. 하지만 수프는 뒤따르는 건조 기술이 더 중요하다. 다양한 재료들의 맛과 향이 우러나온 국물의 수분을 어떻게 제거하느냐가 핵심이다.
과거에는 건면처럼 열풍건조(AD) 방식으로 수분을 말렸다. 그러나 바람과 함께 일부 재료 고유의 향이 사라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해결한 게 바로 진공건조(VD) 방식이다. 진공 상태의 설비에 국물을 넣으면 10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물이 끓기 시작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이른 시간 안에 수분을 날릴 수 있어 풍미가 잘 보존된다. 최근엔 광물을 이용해 VD 공법을 업그레이드한 기술도 적용되고 있다. VD 설비에 다공질의 광물을 설치해 소량의 향 성분까지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아뒀다 다시 수프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수분이 날아가고 풍미 성분만 가루 형태로 농축된 분말수프는 수분 함량이 8% 이하로 떨어진다. 이 정도면 별도로 방부제를 넣지 않아도 밀봉만 해두면 상온에서 12개월은 보존된다. 품질 유지 기한이 6개월인 라면보다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식품을 변질시키는 세균, 곰팡이 같은 미생물은 수분 함량이 15% 미만인 환경에선 번식이 어렵다.
◇라면 자주 먹으면 영양부족?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식품 속 필수 영양소의 이상적인 비율(열량비)은 탄수화물 대 단백질 대 지방이 55~65 대 7~20 대 15~30이다(한국영양학회 조사 2015년 한국인 영양소 섭취기준). 일반적인 라면(유탕면)은 이 비율이 63 대 8 대 29(신라면 기준)다. 물론 건면은 이보다 지방 비율이 낮다. 이 수치만 고려하면 라면 섭취로 영양 불균형이 생길 우려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라면 한 개의 열량은 500㎉ 안팎으로, 한 끼 식사 권장 기준보다 낮다. 어른의 하루 권장 열량이 2,000~2,600㎉ 정도니 한 끼에 600~800㎉는 섭취해야 한다.
열량 부족분은 라면을 조리할 때 다른 식자재를 추가해 채울 수 있다. 이를테면 단백질 비율을 높이고 싶으면 라면 1개당 달걀 1개나 치즈 1장, 어묵 2장, 참치 4분의 1캔 등을 넣는다. 칼슘을 보충하려면 건새우 1큰술이나 브로콜리 2토막, 두부 2쪽을 추가하면 좋다. 마유현 농심 R&D부문 과장은 “라면 제조 공정은 화학과 식품공학의 집합체”라며 “맛과 품질 향상에 노력하고 있는 만큼 라면에 대한 소비자들의 오해가 풀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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