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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12번째 희생양...정치 논리에 멍드는 과학



12번째 희생양… 정치 논리에 멍드는 과학

조선일보
  • 이영완 과학전문기
  • 최인준 기자
    입력 2019.03.23 03:00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 고발
    검찰, 넉달 넘도록 소환 안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11월 신성철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총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디지스트) 총장 시절 해외 연구기관의 장비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연구비를 이중(二重) 지급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과기부는 이어 12월에는 카이스트 정기이사회에 신 총장의 직무 정지 안건을 올렸다. 검찰 조사와 총장 사퇴가 바로 이어질 것 같은 서슬 퍼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4개월이 지난 지금 상황은 예상과 전혀 다르다. 22일까지 검찰은 신 총장을 한 차례도 소환 조사하지 않았다. 12월 이사회에서는 일부 이사의 반대로 직무 정지 안건이 보류됐고 오는 28일 열리는 차기 이사회에서도 안건 상정 여부가 정해지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과기부, 디지스트 관계자 참고인 조사는 했고 신 총장 소환 일정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했다.

    신 총장은 2017년 3월 10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총장으로 선출됐다. 2개월 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과학계 적폐 인사'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 총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문이며 영남대 이사를 지냈다. 한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조사가 이유 없이 길어지면 혐의가 불확실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국내 최고 과학기술대학의 총장을 몰아내려 했다는 의구심만 증폭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 총장은 "(나를 둘러싼) 문제가 해외 기관 관련 일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현재 국제 협력 사안은 거의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며 "빨리 결론이 나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정치 논리에 엉망이 된 과학기술계

    과학계에서는 해외 연구 협력 과정에서 일부 절차 문제가 발생했을 수 있겠지만 과학계 현실을 감안하면 큰 문제가 아닌데도 정부가 의혹을 확대했다고 지적한다. 과기부가 감사보고서가 나오기도 전에 신 총장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의혹 규명보다 정치적 논리를 앞세운다는 것이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사태 발생 직후 "신 총장 사태에 대해 한국 과학자들이 '정치적 숙청'이라고 비판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과기부는 검찰 고발 후인 지난 1월에는 논란이 된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를 방문했다. 신 총장이 이 연구소의 고가 장비를 무료로 쓸 수 있는데도 일부러 200만달러의 사용료를 냈다는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과기부는 이 돈의 일부가 연구소에 있는 신 총장 제자의 인건비로 지급됐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로렌스버클리 측은 "디지스트와 계약은 미국 법에 따른 정당한 것"이라며 "어떤 이면 계약도 없다"고 반박했다.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외국 연구기관이 연관된 사안에서 이면 계약을 맺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퇴진 압박을 받은 과학계 인사는 신 총장뿐이 아니다. 박태현 전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 조무제 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등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임기를 남긴 상태에서 중도 사퇴한 과학 분야 기관장만 11명에 이른다. 상당수는 "과기부 차관이나 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에게 사임을 종용받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임기철 전 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은 "과기부 차관으로부터 '촛불 정권이 들어섰으니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임기 2년이 남은 상태에서 사퇴했다"고 말했다.

    기관장이 사퇴를 거부한 연구기관에는 과기부가 표적 감사를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과기부는 지난해 7~8월 손상혁 전 디지스트 총장에 대해 연구비 부당 집행 의혹을 제기하며 두 차례 감사를 벌였다. 손 전 총장은 감사 직후인 지난해 11월 사퇴했다. 박영아(KISTEP 전 원장) 명지대 교수는 "특정 인사를 쫓아내려는 '찍어내기식 감사'가 과학계를 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과기부는 "과학계 기관에 대해서는 법과 절차에 따라 감사를 하고 있으며 혐의가 발견되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고발 조치하고 있는 따름"이라며 "특정 인물을 겨냥한 표적 감사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학 연구보다 청와대 정책이 우선

    과기계에서는 정부가 기초과학 등 주요 연구개발(R&D)은 뒷전이고 '정규직 전환'과 같은 청와대의 역점 사업에 매몰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과기부가 2017년 10월 발표한 '출연 연구기관 비정규직 6400여 명의 일괄 정규직 전환'이 대표적이다. 연구기관은 연구 프로젝트에 따라 해당 분야에 전문 능력을 갖춘 연구원을 공개경쟁으로 뽑아 최고의 성과를 내야 하는데 정부가 이런 특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구원의 대규모 정규직 전환을 본 청소원·경비원 등 2700여 명도 정규직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서는 등 정부 출연 연구소 안팎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이석훈 박사는 "파견·용역직의 정규직 전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한정된 예산을 이런 사안에만 쓰면 정
    작 연구 재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전 정부가 추진한 달 탐사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도 축소·연기되고 있다. 전 정부에서는 달 탐사선 발사 사업을 2020년으로 잡았는데 이번 정부는 이 일정을 2030년으로 늦췄다. 탈원전 정책으로 수소 생산용 차세대 원자로 등 원전 관련 연구가 전면 중단될 처지인 것도 정치 논리가 과학계를 흔든 사례 중 하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3/20190323002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