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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논설위원
가까운 후배가 대표를 맡기도 해 지켜본 일이다. 작년에 사단법인을 차리겠다는 후배가 서류를 갖춰 관청을 찾았다. 7∼9급으로 추정되는 주무관(담당 공무원)이 “법인 이름에 청년이 들어가는데 왜 이사진에 청년이 포함돼 있지 않느냐”며 다시 서류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신생아 이름이 들어간 법인도 있는데 그럼 이사진에 신생아도 포함시켜야 하느냐”며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밖에도 도장이 잘못됐다는 것에서 시작해 사무실 실사 일정도 일방적으로 세 번씩 바꿔가며 온갖 트집을 잡아 시간 끌기를 8개월. 이사진에 청년을 포함시킨다는 추후 보완 조건을 달아 겨우 설립 인가증을 받았다.그리고 몇 달 뒤 서류를 보완해 갔더니 그새 담당자가 바뀌어 있었다. 새 담당자는 “여기에 청년이 이사로 포함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면서 “이런 추가 서류는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조그만 회사라도 차려보고 운영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는 약과라고 할 것이다.
아무리 하위직 공무원이라도 요즘 몇백 대 1의 어려운 시험 관문을 뚫고 들어왔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 터무니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른바 ‘내재적 접근’을 시도해봤다. 결론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행위에 대한 동기였다. 착착 서류를 잘 내줘 봐야 이득 되는 것 없고, 늦게 내줘도 손해 보는 게 없는데 서둘러 처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에 하나 잘못되면 평생 안정직장이 흔들릴 수도 있다. 게다가 인허가권을 틀어쥐고 농간을 부리면 현직 혹은 퇴직 후 이권으로 직결될 수도 있다. 더 큰 인센티브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규제를 풀지 않는 게 공무원으로서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지낸 강경식 씨는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라고 했던 말로 외환위기 주범처럼 낙인이 찍혀 있으나 관료 사회에서는 대단히 개혁적인 성향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금융실명제 도입을 추진했고, 기업 노동개혁을 밀어붙이려다 관료 내 반대 세력에 번번이 부딪혔다. 강 부총리는 그럴 때마다 관료들이 가장 큰 고질병인 ‘노파심’ 때문에 규제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민간이 더 잘할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잘못되면 돌아올 책임과 걱정 때문에 규제를 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규제는 공무원 개인보다 시스템에 문제가 더 많다. 아무리 공무원 개개인을 욕해 봐야 꿈적도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나서서 “규제혁신 속도가 답답하다”고 혼을 내도 정권 바뀔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다.
자기반성을 하자면 이제 언론도 정부 탓을 줄여야 한다. 장마가 져도, 고속버스가 밭으로 굴러도 모두가 천재(天災) 아닌 인재(人災)이고, “그동안 공무원은 뭘 하고 있었느냐”며 책임을 지우면 의도와는 반대로 공무원의 권한만 더 넓혀주는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공무원에게 책임을 덜 묻고 제발 정부가 그만 좀 간섭하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반으로 줄여도 모자랄 판에 이번 정부 임기 내 공무원 수를 17만 명이나 늘린다고 한다. 재직 시 들어갈 급여 327조 원, 퇴직 후 연금 92조 원(국회예산처 추산)의 세금도 아깝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무원 고질병이 우리 사회에 확산 심화되는 것이 훨씬 큰 국가적 비용이 아닐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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