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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서승욱의 나우 인 재팬] 아베 경제 보복은 '강한 일본' 야심에서 시작됐다

[서승욱의 나우 인 재팬] 아베 경제 보복은 ‘강한 일본’ 야심에서 시작됐다

                

 

 
     

과거사 벗고 동북아 맹주 노려
7년 장기집권하며 치밀한 준비
위안부·징용 문제로 엉키자 강수

“한국, 동네 축구식 수세외교 안 돼
동북아 조망하는 큰 방향 세워야”

2006년 전후(戰後) 최연소(52세) 총리에 등극한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꿈이었다. 그는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전 세계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고, 우리의 아이들이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메이지 유신의 주축이던 조슈번(長州藩·지금의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베에게 ‘아름다운 나라’는 ‘강한 일본, 그레이트(Great) 닛폰’이다. 그러나 제1차 아베 내각은 1년 만에 단명했고, 그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극적으로 2012년 말 정권을 되찾은 아베는 다시 칼을 갈았다. 서두르다 화를 부른 1차 집권 때의 경험을 살려 “한 걸음 앞서가려 하지 말고 국민보다 반걸음만 앞서가자”(아베 총리 본인)며 속도 조절을 했다. 군사 대국의 꿈도, 개헌의 야망도 조금씩 조금씩 전진시켰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도 아베가 그리는 큰 그림과 관련돼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민당 내 사정에 밝은 도쿄의 한인 단체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부른 아베의 원점은 2015년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흔들리면서부터”라며 “자신의 지지기반인 ‘우익’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 예산 10억 엔을 지출하면서까지 만들어낸 합의가 무너지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요미우리 신문도 3일 자에서 양국 관계 악화의 계기를 “한국이 위안부 합의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신문은 “합의 당시 자민당 보수파들은 ‘어차피 또 사과해도 (한국이) 또 뒤집을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아베 총리는 미래지향적 관계구축을 위해 반대론을 물리쳤다”며 “그래서 아베 총리의 주변에는 한국에 대한 불신감이 강하다”고 했다.
 
위안부 합의가 탄생한 2015년은 아베 총리가 ‘강한 일본’이란 큰 그림을 위한 기초작업에 몰두한 해다. 패전 70주년이던 그해, ‘아베 담화’가 나왔다. “아이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는 담화 속 한 문장이 그의 핵심 메시지였다. 그해 12월 한국과 체결한 위안부 합의도 그 연장 선상이었다. ‘최종적·불가역적’으로 과거사 프레임에 종언을 찍어야 세계의 리더로서 일본을 재부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 유력 신문의 간부는 “문 정부 들어 위안부 합의가 공중에 떴고, 대기업 징용 판결까지 겹치며 아베의 구상이 엉망이 됐다”고 했다.  
 
한국의 급소를 내려찍은 수출규제 강화와 화이트국가 배제 조치엔 ‘이번만큼은 과거사의 걸림돌을 확실히 치우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선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과거사 논쟁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겠다는 아베 총리와 결투를 벌이게 됐다. 2일 일본의 ‘화이트국가 배제’ 시행령 처리 뒤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이라고 했다. 공식 반응은 없었지만 총리관저와 외무성에선 특히 ‘가해자’ 표현에 불쾌감을 터뜨렸다고 한다. 소식통은 “이번 조치 배경의 핵심은 피해자-가해자 틀에서 벗어나자는 것인데, 문 대통령이 그 의미를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는 게 일본 정부 내 기류”라고 했다.
 
아베 정권은 지난달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안 국회 통과를 위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야당을 끌어들여서라도 개헌을 시도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내적으로는 ‘개헌’,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이 향후 아베 정권의 핵심 키워드다. ▶과거사 논란과 전범국의 멍에를 벗고 ▶자위대의 헌법 명문화로 정상국가로 가는 길을 열고 ▶미국의 압박을 핑계로 동북아 내 군사적 존재감을 키우고 ▶중국에 맞선 인도·태평양 해양 라인의 맹주로 재탄생하는 게 아베가 그리는 ‘4대 그랜드 디자인’이다.
 
아베 총리는 올 11월 일본 헌정사상 최장 총리가 된다. 2021년 9월 임기 만료까지, 또는 임기 연장을 해서라도 달성하려는 큰 그림 도입부에 한국과의 역사 전면전이 자리한 모양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중국몽(위대한 중화 민족의 부흥)’에 이어 일본 아베 총리의 ‘강한 일본’까지 가세하며 한반도는 강대국 담론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최근 도쿄를 방문했던 전직 외교부 고위 관리는 “주변 강대국들과 달리 한국엔 국가 운영과 외교의 큰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 그런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외교의 원칙과 큰 방향이 있어야 공세적인 외교를 펼 수 있는데, 그런 담론이 없으니 동네축구처럼 사안에 따라 몰려다니며 수세적으로 공 지키기와 걷어내기에만 몰두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본 내 국제정치학 권위자인 나카니시 히로시(中西寬) 교토대 교수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엔 외교의 기본이 대미, 대중, 대일 외교일 텐데, 정권과 사안에 따라 극단적으로 바뀌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북아를 조망하는 시각과 우리만의 큰 그림이 없어 중국(사드 문제), 미국(동맹 유지와 무역), 일본(역사·경제 갈등)과의 외교에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수세적·사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들이다.
 
서승욱 도쿄특파원 sswook@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서승욱의 나우 인 재팬] 아베 경제 보복은 ‘강한 일본’ 야심에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