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비밀의 정원’ 구례 쌍산재에 빠지다
구례=김태언 기자 입력 2021-03-08 03:00수정 2021-03-08 04:41
TV프로그램 촬영으로 유명해져… 200년된 고택에 年 3만명 찾아와
대갓집 아닌 시골 한옥 같은 외관, 들어서면 미로 같은 신비감에 매료
멸종위기 토종식물 자라는 마당… 넓은 여백의 산수화처럼 여운 줘
전남 구례군 쌍산재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 높이가 다른 전통 한옥 4채가 햇살을 맞고 있다. 임세웅 문화관광해설사 제공
5일 전남 구례군 상사마을 쌍산재 입구. 여기저기서 “애걔?” “생각보다 작네” 하는 말이 들렸다. 보통 대갓집 하면 떠올리게 되는 웅장함은 없었다. 대문 앞에 서면 한옥 3채의 기와만 보였다. ‘작은 한옥인가’ 하는 생각은 열 걸음쯤 떼자 바로 사라졌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 숲과 그 너머로 펼쳐진 뜰과 한옥. 들어가 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택이 펼쳐졌다.
매년 이곳에 오는 이는 3만 명이 넘는다. 지난해 9∼12월 휴원했음에도 3만6000여 명이 방문했고, 이 중 10%가량은 외국인이었다. 2008년 KBS ‘1박2일’, 올해 tvN ‘윤스테이’의 촬영지로 소문나면서 관람객은 더 늘고 있다.
구릉을 따라 만든 돌계단과 대나무 숲이 왼쪽에 조성돼 한껏 울어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크게 들린다. 임세웅 문화관광해설사 제공
약 200년 전에 만들어진 쌍산재는 현 운영자인 오경영 씨(56)의 고조부 호 ‘쌍산(雙山)’을 따 이름이 붙여졌다. 쌍산재의 당몰샘은 고려 이전부터 있었다고 알려진다. 이 샘물을 마시면 젊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오 씨의 선조는 이를 주민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담장을 샘 뒤편으로 물렸다고 한다. 오 씨 가문은 출세보다는 산사에 묻혀 한학을 공부하며 풍류를 즐기던 유학자의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등 참선비의 모습을 고수했다.
쌍산재가 지내온 시간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자 멸종위기 야생식물인 히어리를 포함해 100여 종의 수목이 있다. 2018년 10월에는 전남도 제5호 민간정원으로 등재돼 전국 31개 민간정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임세웅 전남문화관광해설사협회 문화관광해설사(54)는 “한옥과 한옥 사이를 메우는 넓은 마당과 숲, 한국의 자연 문화자원이 공존하는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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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산재 내 한옥은 9채가 있지만 총면적은 1만6000m²에 달할 정도로 여백이 많다. 대나무 숲을 중심으로 아랫동네, 윗동네가 나뉘는 미로 같은 공간 디자인도 방문자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아랫동네로 불리는 공간은 대문 오른쪽에 놓인 안채, 바깥채, 사랑채다. 안채는 할머니, 어머니 등 여성들이 주로 생활했던 살림 공간이다. 춘궁기에 곡식을 채워두고 어려운 이웃에게 빌려주던 ‘나눔의 뒤주’도 있다. 안채 옆에는 운영자 오 씨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바깥채가, 그 옆에는 손님들이 묵었던 사랑채가 있다.
돌계단을 따라 대나무 숲을 거닐면 비밀의 문 ‘동백나무 터널’이 나온다. 터널을 지나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 탁 트인 정원과 하늘이 드러난다. 쭉 뻗은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을 보면 가정문(嘉貞門)이 나온다. 쌍산재에서 가장 깊게 자리한 서당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길 양쪽에 놓인 흰색 돌들은 달이 뜨면 빛이 반사돼 이정표가 된다. 길 끝에서 굽어 있는 사철나무는 고풍스럽다. 서당채는 집안 아이들이 모여 글공부를 하던 곳으로, 상사마을에는 그때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동네 아이들이 이제는 노인이 되어 여전히 살고 있다.
돌계단을 다 오르면 드넓은 뜰이 펼쳐진다. 뜰을 지나 왼쪽에는 옥빛 저수지로 이어지는 영벽문(위쪽 사진)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면 서당채 입구인 가정문이 자리 잡고 있다. 임세웅 문화관광해설사 제공
서당채 옆 건물인 경암당(絅菴堂)과 서당채 사이에는 작은 연못 청원당(淸遠塘)이 있다. 네모 형태의 연못 안에 둥근 섬이 있는 구조인데 네모는 땅(음)을, 원은 하늘(양)을 의미한다. 음양사상이 드러나는 구간이다. 놀라움은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다. 경암당 바로 옆에 놓인 영벽문(暎碧門)은 쌍산재의 정수라고 불린다. 네모난 문 밖으로 펼쳐진 옥빛 사도저수지와 지리산은 액자에 걸린 그림 같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작은 계곡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화엄사 종소리가 계곡을 타고 들려온다고 해 ‘종골’이라 불렸다.
한두 시간 정도 쌍산재를 거닐면 이곳이 사랑받는 이유를 절로 알게 된다. 오 씨는 “집이란 무릇 사람이 드나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2004년 관람 및 숙박 운영을 시작했다”며 “아궁이 같은 한옥만의 특징과 온기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젊은이와 외국인들도 온전히 즐기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쌍산재는 ‘윤스테이’ 촬영 후 내부를 수리한 뒤 지난달 26일 재개관했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재정비로 아직은 관람만 할 수 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장 가능하며 입장료는 1만 원. 숙박 재개일은 추후 공지할 예정이다. 숙박비는 15만∼35만 원으로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구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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