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재니스 조플린의 환생
우연히 미국 경연 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출연한 13살 코트니 해드윈의 공연 영상을 보았다. 수줍고 앳된 얼굴로 무대에 오른 그가 오티스 레딩의 ‘하드 투 핸들(Hard To Handle)’을 불렀다. 이 모습은 흡사 1960년대 말 미국 히피 문화를 이끌었던 여성 보컬리스트 재니스 조플린의 환생 같았다. 모두 기립박수를 쳤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은 흥분해서 “당신은 이 시대 사람이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시대에서 왔군요”라고 외치며 골든 버저를 눌러 그를 단번에 합격시켰다.
환생이나 윤회를 믿지 않지만, 주변인들의 전생(前生)을 상상해 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세계 어딘가에 흩어진 입자였다가, 인간의 형태로 모여들었다가, 다시 입자의 처지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완전한 의미의 전생이란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만, 그렇기에 전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도무지 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 저 독특함의 배후를 어쩐지 전생이라고 설정해 보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힙합과 일렉트로닉 팝이 음악 시장을 독식한 요즘도 매일 조이 디비전을 듣는 나의 친구. 그의 전생은 어쩐지 80년대 영국 청소년이었을 것 같다. 에코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히피들을 떠올리게 하고, 재즈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친구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를 부를 때면 그의 영혼은 아프리카에 기원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라캉의 텍스트에 빠져 그 해석에 한 생애를 다 바치는 선생님은 분명 전생에 유럽의 아카데미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은 사실 기이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많은 문화를 다채롭게 누릴 수 있는 시대에 개인의 취향과 기질은 어떻게 연유하는 것인가? 나는 세대론을 싫어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공간은 그런 식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개인의 신체를 매개하여 서로 파악될 수 없는 역학 관계를 형성한다. 세대로 나누어 개인의 성향을 가늠하거나 사회문화적 변화를 통해 한 세대를 측정하는 방식이 내게는 설득력이 더 부족해 보인다. 시대의 보편적 영향력으로부터 조금씩 비켜나 있는 사람들, 혹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들. 언제나 그쪽에 더 눈길과 마음이 간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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