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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전술핵이 김정은보다 나쁜가

[오늘과 내일/이승헌]전술핵이 김정은보다 나쁜가

이승헌 정치부 차장 입력 2017-09-02 03:00수정 2017-09-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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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 차장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인근엔 밖에서 보면 정체를 알기 어려운 대형 건물이 하나 있다. 외벽 콘크리트는 물론이고 철근이 일부 드러나 있다. 처음 봤을 땐 폐건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안에 들어가면 보안이 삼엄하다. 올해 초 특파원 시절 가봤더니 벨트를 풀고 신발도 벗으란다. 가방 속까지 뒤진다. 국무부나 의회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 건물은 미 에너지부 청사다. 우리로 치면 산업통상자원부의 ‘자원’ 파트다. 그런데 워싱턴 사람들에게 “국무부, 국방부 못지않게 힘센 부처가 어디냐”고 물으면 십중팔구가 에너지부라고 한다. 핵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 건물 1층엔 일본에 투하해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미국의 핵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자료가 전시돼 있다. ‘핵은 곧 미국’이라는 자부심이다. 우리가 군사용 핵물질을 갖지 못하는 것도 이 부처가 주도한 한미원자력협정 때문이다.

에너지부가 생각난 것은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을 워싱턴에서 만나 전술핵 재배치 이슈를 논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다. 한미 양국이 김정은의 핵 도발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으면 그동안 언급을 금기시했던 전술핵을 거론했다고 공개했을까 싶었다. 

전술핵 재배치는 사드처럼 미군 자산을 빌리는 것이다. 미국은 1991년 말 전술핵을 한국에서 철수시킨 뒤 지금까지 반대해 왔다. 왜 그랬을까? 기자는 에너지부에 대한 워싱턴의 인식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핵문제만큼은 북한은 물론이고 한국, 일본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파원 시절 주요 인사를 만날 때마다 전술핵에 대해 물었지만 답은 비슷했다. 존 매케인 미 상원 군사위원장은 지난해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에 만나 “미군의 핵우산으로 충분한데 무슨 전술핵이야”라며 웃어 넘겼다. 올해 초까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군축·핵비확산 담당 선임보좌관이었던 존 울프스탈은 “한미 이익에 맞지 않는다”고 싸늘하게 말했다.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꿈도 ‘한국 핵무장 불가론’에 한몫했다.


그런데 전술핵 ‘소유주’의 생각은 도널드 트럼프 취임 후 미세하게 바뀌고 있다. 트럼프로선 동북아 비핵화라는 ‘아름다운 목표’보다 김정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막는 게 훨씬 중요하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로선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핵우산보단 미 본토의 각종 창고에서 ‘썩고 있는’ 전술핵을 재활용하는 게 더 경제적일 수 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3월 18일 방한 후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 허용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한 게 그냥 나왔겠는가. 송 장관이 전술핵을 거론했다고 밝힌 것도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당장 전술핵을 배치하기는 어렵다. 자유한국당 당론이라 보혁 간 정치 이슈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전술핵 재배치를 검토한 적이 없다”(1일 고위 관계자)는 식으로 나오는 게 전략적으로 최선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전술핵 찬성론자 중 상당수는 우리도 전술핵이든 뭐든 새로운 대북 레버리지(지렛대)를 갖자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떻게든 정부가 북핵 외교력을 발휘해 달라는 또 다른 목소리다. 그런데도 ‘한반도 운전석’에 앉아 김정은과의 대화 모멘텀을 만들겠다고 전술핵을 북핵보다 더 나쁜, 무슨 뿔 달린 괴물 정도로 보는 반핵 단체식의 접근은 우리 스스로 선택의 폭을 줄일 뿐이다. 청와대는 지금 너무 낭만적인 것 아닌가.

이승헌 정치부 차장 ddr@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NewsStand/3/all/20170902/86129136/1#csidxff5e1c4342d6cfb93984b40b89f7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