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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평창 외교의 함정

       


[오늘과 내일/박정훈]평창 외교의 함정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입력 2017-12-27 03:00수정 2017-12-2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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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2008년 8월 8일 중국 베이징 냐오차오 경기장에 온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초라해 보였다.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한 외국 올림픽 개막식이었지만 화장실 인근 자리를 배정받는 수모를 당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좁은 자리에서 무더위와 싸워야 했다. 100여 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초유의 행사는 중국의 불손한 의도대로 진행됐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올림픽을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만한 국호를 현실감 나게 포장하는 외교무대로 활용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평창 올림픽에 모든 걸 걸고 있다. ‘한반도 운전자론’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기회로 삼을 각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자리에 모인 개막식에 북한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이라…. 전쟁 위기까지 불러온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 수 있는 반전의 계기를 만들려는 듯하다. 

꿈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가지 않겠다며 가족을 포함한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한국 정부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이 오길 기대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의 참석이 점쳐지고 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초청한 시 주석은 참석 여부를 통보했는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겠다”는 우리 정부의 저자세에도 기존 사드 배치를 걸고넘어지며 길들이기를 하는 중이다. 시 주석이 가느냐, 마느냐는 한국을 맘대로 요리하려는 저들의 레시피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도핑 문제로 자국 선수단이 불참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혼자 오기 뻘쭘한 처지다.

일본 사정은 더 안 좋다.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가 발표하는 결과문에는 협상 과정에서의 박근혜 정부 책임이 주로 기술된다지만 일본은 못마땅해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불참할 거란 보도도 계속 나온다. 참석을 요청하러 일본에 갔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욕하다 아쉬운 소리 하려니 면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도 우리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다시 끄집어낸 일에 못마땅해하는 눈치다.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피해자의 아픔을 우선시한다는 명분에도, 파기하기 힘든 위안부 합의를 재론하는 건 한국의 외교적 입지를 좁힐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참석도 불투명하다.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하지 못한 시점에 평화무대에 나서는 건 부담이다. 최근 만난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간부는 “북한이 추가 도발을 통해 핵과 미사일 기술을 완성한 뒤 평화공세 차원에서 올림픽에 나설 순 있지만 그게 평화올림픽인지 공포올림픽인지는 각자 판단할 문제”라고 말했다.


적폐청산이야 대통령 뜻대로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대국을 적폐로 규정할 수 없는 외교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지난 한중 정상회담에 상처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간 우정이 식어가는 걸 겁내지 않고 있다. 아베 정부는 한일 관계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데만 골몰한다. 2050년 패권국이 되겠다는 중국몽(中國夢)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보려는 문 대통령에게 시 주석은 무릎부터 꿇으라고 한다.

정부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까지 미루자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에 목매고 있다. 하지만 유엔의 추가 제재로 마음이 급해진 김정은이 개막식까지 남은 40여 일 사이 도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모든 걸 건 평창 외교가 실패하면 운전자론은 세계적 조롱거리가 된다. 지금은 기회로 보여도 언제든 함정으로 바뀐다. 이대로라면 평창 올림픽은 대한민국 외교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