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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보다 훨씬 처벌이 무거운 죄목인 ‘소요(騷擾)죄’는 유신시대와 계엄령 때 외에는 딱 두 번 등장했다. 1986년 5·3인천사태와 2015년 11월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시위 때다. 필자는 두 현장을 모두 봤다.5·3사태 때의 기억이다. 옛 인천시민회관 앞 사거리에 앉아 구호를 외치던 수만 명의 시위대속으로 갑자기 경찰 페퍼포그 장갑차(개스차)가 곤봉을 휘두르는 백골단(사복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그런데 페퍼포그 차의 시동이 꺼져 군중 속에 갇혀 버렸다. 백골단은 이미 물러난 상태였다. 시위대가 각목 등으로 차문을 떼어냈다. “화염병 가져와!” 곧 화염병을 던져 넣을 기세였다. 그때 다시 시동이 걸린 페퍼포그 차는 간신히 도주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만약 화염병을 넣었으면 폭발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다. 군중집회에선 순식간에 예기치 않은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런 걱정이 다시 든 것은 거의 30년 후인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오후의 민중총궐기 현장이었다. 당시 채널A에 파견 중이던 필자는 당직 근무였다. 채널A는 미리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과 동아미디어센터 옥상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집회 현장을 처음부터 밤까지 생중계했다.
별다른 충돌 없이 진행되던 집회에서 오후 3시를 넘어서면서 불길한 조짐이 일었다. 차벽으로 세워놓은 경찰버스들에 일부 시위대가 밧줄을 걸고 당기기 시작했다. 일부는 버스 지붕에 올라갔다. 경찰버스들이 맥없이 끌려 나가자 이를 막으려 앞으로 나선 의경들을 향해 시위대는 파이프와 쇠사다리를 마구 휘둘렀다. 경찰 살수차가 물을 뿜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다. 그 후 벌어진 폭력사태는 도심 시위 사상 가장 과격한 폭력 중 하나로 기록됐다. 경찰 차량 52대가 부서지고 경찰 192명 등 수백 명이 다쳤다. 농민 백남기 씨가 경찰의 직사살수에 쓰러져 숨지는 비극도 벌어졌다. 경찰은 5·3사태 후 처음으로 소요죄를 적용했으나 검찰 기소단계에서 소요죄는 빠졌다.
그런데 불과 3년도 안 돼 그날의 진실이 뒤집어 졌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최근 “과도한 경찰권 행사였다”고 결론짓고, 경찰에 손해배상청구소송 취하를 권고했다. 수많은 국민이 당시 상황을 지켜봤는데 경찰 스스로 정반대 결론을 내린 것이다.
물론 경찰 스스로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위원회는 경찰청 소속이지만 위원 10명중 7명이 민간인인데 대부분 진보 좌파 성향 활동가들이다. 위원회는 쌍용자동차 사태, 용산 화재참사에 대해서도 과잉진압 결론을 내렸다.
만약 문재인 정권이 균형감을 가진 중도 인사들을 등용해 중립적 자세로 적폐청산을 했어도 큰 성과를 거뒀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폐단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적인 결정에 요구되는 균형감과 객관적 판단능력을 압도하는 이념적 경향성을 지닌 이들이 대거 진출해 칼을 휘두르니 엘리트 공무원들이 공직을 떠나고, 경찰대 학생회장 출신의 젊은 현직 경감이 경찰청 정문에서 1인 시위에 나설 정도로 억울해 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완장들이 뒤집어 버린 진실은 언젠가 제자리를 찾겠지만, 그 과정에서 더 깊게 베인 이념적 양극화의 상처는 어쩔 것인가.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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