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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대통령 스스로 생각하는 文과 남들이 보는 文 사이에 괴리 커
북-미 협상에도 혼자만 중재자 착각… 가보지 못한 길 함부로 가지 말고
남들 다 가는 길이나 제대로 가봐야
송평인 논설위원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했을 때다. 어느 기자가 장관이나 수석비서관도 대면보고한 적이 드물다는 점에 대해 물으니 대통령은 충분히 많은 서면보고를 받고 의문이 있으면 수시로 전화로 묻는다고 답한 뒤 배석한 장관들을 돌아보면서 “대면보고가 꼭 필요하세요”라고 물었다. 그 말에 장관들도 웃고 참모들도 웃고 기자들도 웃고 말았지만 그것은 고쳐지지 않을 불통을 깨닫는 허탈함의 웃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사회원로 초청 자리에서 “적폐 수사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통제하지 않았다’도 아니고 ‘통제할 수 없다’는 유체이탈적 화법은 뭔가. 민정수석이 검찰에 전화도 하지 않는데 무슨 통제냐는 생각은 밤늦도록 줄을 쳐가며 보고서를 읽고 있는데 대면보고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짧고 허망하다.
결국 법원에서 무죄가 난 돈 봉투 사건으로 서울중앙지검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5년 차나 아래 기수를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없는 틈을 타 내리꽂아 적폐 수사의 틀을 만든 것이 대통령 자신이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던지 죄가 되는지 의심스러운 사건에는 꼭 개입했다.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의 공관병 갑질 의혹이 불거지자 ‘뿌리를 뽑으라’고 지시했다. 군 검찰은 죄가 되지 않자 별건인 뇌물로 기소했으나 결국 무죄가 됐다. 계엄령 문건에는 대놓고 수사를 지시했고, 실행계획과는 거리가 멀자 계엄령 검토 자체가 불법이라는 억지를 부렸다. 청와대가 혐의의 입증이 곤란에 처한 순간마다 캐비닛 문건이란 걸 들고나온 사실을 일일이 말해야 할까.
문 대통령은 지난달 군 장성들을 만난 자리에서 “칼은 뽑았을 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칼집 속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고 말했다. 그 말은 칼집 속의 칼을 늘 더 예리한 것으로 준비하고 칼 쓰는 법을 끊임없이 연습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중요한 군사훈련을 모두 중단시켜 칼 쓰는 법마저 잊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문 대통령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나(I)’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me)’ 사이의 간격이 커 보인다. 사람에 따라서는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처럼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졸렬한 생각으로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할지라도 최소한 자신이 칼을 버리고 있다는 자기 인식은 있어야 한다. 그런 자기 인식도 없이 태연하게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 대통령은 올 신년사에서 경제기조와 관련해 “가보지 못한 길이어서 불안하지만 가겠다”고 말했다. 잘 아는 분야도 가보지 못한 길은 함부로 가서는 안 되는 법인데 문외한인 분야에서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길을 굳이 가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지 그 심리가 궁금하다.
문 대통령은 계급장 떼고 토론하기 좋아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에게 대화란 ‘진리’가 적폐의 소음을 참고 견디는 지루한 자리라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분에 넘치는 중요한 자리를 맡는 것은 자신의 미숙한 판단을 과신할 수 있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최소한 안보와 경제에서만큼은 남 얘기도 좀 들으면서 갔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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