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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정치인 박근혜'녹슬지 않았다


[김대중 칼럼] '정치인 박근혜' 녹슬지 않았다

조선일보
  • 김대중 고문
입력 2020.03.10 03:20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 '천막 당사' 이래 가장 현명한 정치적 판단
친박의 소멸과 안철수 세력 퇴색으로 야권 변환 일으킬 것

김대중 고문
김대중 고문
4·15 총선에서 야권의 승패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향배에 달렸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도 그가 실제로 야권 단합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는 접었다. 그가 과거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전신)에 대한 원망, 배신감을 드러내며 '친박'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행태를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정치인 박근혜의 한계인가 실망하며 4·15 총선에서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는 것은 무망하다고 봤다.

그런 나의 생각은 틀렸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주 옥중 서신을 통해 '기존 거대 정당'(미래통합당을 지칭)을 중심으로 단합해 여권을 심판해줄 것을 친박 세력 등에 당부했다. 이제 그는 영어 생활을 하는 불운의 탄핵 대통령에서 분열된 야권을 단합시켜 거대 집권 세력에 도전하게 만드는 막후 실력자로 변신한 것이다. 어쩌면 박 전 대통령의 결단은 '천막 당사' 이래 가장 현명한 정치적 판단으로 기록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처음부터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의 단합을 도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친박으로 대표되는 탄핵 반대 세력이 자유한국당을 대체(代替)하고 야권의 주류가 될 것을 기대하고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박 자체가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태극기 세력이 좀처럼 동력을 얻지 못하는 데다 선거를 앞두고 일부 정치적 방랑자들이 서로 야합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친박을 매개로 한 정치적 부활의 기대를 접은 것이다. 차라리 '기존 야당'에 힘을 실어 그쪽으로 야권을 통합시키는 것이 보다 실효적이라고 판단했음 직하다. '정치인 박근혜'의 머리는 아직 녹슬지 않은 것이다. 그가 권력을 잃기 전 이처럼 실효적이고 실체적이며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면 탄핵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옥중 서신 이후 미래통합당의 한 중진은 야권의 일대 변환을 전망하며 그 특징을 친박의 소멸과 안철수 퇴색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했다. 앞으로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보수·야권에서 친박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우선 공천에서 탈락하자 미래통합당을 떠나 '박근혜'를 업고 출마하려던 친박 주자(走者)들의 이탈 행렬이 단절될 것이다. 나가봤자 그들이 기댈 언덕이 없어진 셈이다. 안철수 퇴락의 직접적 원인이 박근혜 옥중 서신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철수계(系) 인사들이 박근혜 서신으로 흡인력이 강해진 미래통합당으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삼투현상이다.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이미 지역구 출마를 포기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의 정치적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친박의 존재가 의미가 없어지고 안철수 세력이 희미해진 이상, 4·15 총선은 더불어민주당과 그의 위성 세력으로 간주되는 범여(汎與), 그리고 단일화된 미래통합당의 양파전으로 갈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동안 '4+1'이라는 괴상한 정치 괴물을 만들고 야권의 사분오열을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던 민주당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우한 코로나 사태로 민심이 흉흉한 상황에서 야권 분열의 카드마저 놓쳐버린 여권은 이제 선거 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탄핵 공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장은 총선전략 보고서에서 이대로 가면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미래통합당을 이기더라도 미래한국당이라는 위성 정당의 비례대표 득표로 미래통합당이 원내 제1당이 될 수 있다고 보고 "미래통합당이 제1당이 돼 탄핵을 추진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여권 내부의 요청과 위기의식의 결과로 민주당은 '비례대표용(用) 연합 정당'을 만들기로 했다. 미래통합당의 위성 정당을 '꼼수'라고 맹비난해 온 집권 세력이 오죽 급했으면 안면몰수하고 스스로 흙탕물을 뒤집어썼겠는

이런 상황들이 반드시 박 전 대통령의 야권 통합 메시지로 인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은 정치 프로들이 서로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것이며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는 교호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볼 때 박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은 4·15 총선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문 정권의 입지를 압박할 위치까지 득세하면 박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고 그것은 야당 내에 또 하나의 분파 요인으로 잠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야당으로서 중요한 것은 총선에서 이기는 것이다. 총선에서 이겨 문 정권의 좌편향 질주에 제동을 거는 것이며 2년 뒤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되찾아 오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09/20200309037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