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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살아온 이야기,해야 할 이야기

옛날의 군것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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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의 종착지인 대구에 도착하여 어느집엘 가서 20여명이  임시로 묵게 되었는데

주인 집에서 인심 좋게도 거실을 내줘 여기서 몇날을 보내게 되었다..

밤에 잠을 청하려면 가운데로 발을 모으고 빙둘러 누워 잠을 잤던 기억이난다.

 

이집엔 누렁이 한마리도 있고, 나보다 다섯살 위인 작은형을 괴롭히고 때리기까지 하는 주인집 아들도 있었으나

이일 이후론 우리 형제에겐 감히 괴롭힘을 주지 않었다.

 

이일이란 하루는 작은 형이 이 주인 집 아들에게 매 맞은 일이 있었는데

내가 조용히 다가가선 이놈 궁둥이를  힘껏 물어버려  다시는 덤비지 않게 된 일이다.

이놈 되게 아팠을게다.ㅎㅎㅎㅎㅎㅎ

 

대구 생활이란게 당시 먹을게 빈약하다보니  상품으로 수확하고난 후의  버린  양배추 잎을 주워다가

이것으로 식사를 대신 했던 기억이난다.

아마 쌀 1할 에다 양배추 9할 아니였겠나?

밥으로도 해먹고 반찬으로도 해먹고.... 질리게도 먹어,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양배추 먹으라하면 시큰둥해진다.

위에 좋은 비타민 U가 많이 들어있어 위와 장이 안좋은 내겐 좋은 음식이지만 입안에선 달디 달아도

기분은 별로이다.

 

정전후 고향 원주로 돌아와서 교회 앞집에서 살었는데

집안 뜰이 좁으니 자연 교회 마당에 가서  늘 살었다.

여름 교회 마당엔 도마토밭이 있어 가끔  잘 익은걸 실례~~~~

주님 용서 하소서 !! 다른 곳을 쳐다 보시고 못본체 하소서.......

 

용돈이란 개념도 없을 당시

 

한달에 두세번 먹을수 있는 아이스 케키는 입으로 쭉 빨면 얼음만 남는 희안한 케키.....

이걸 먹었던 당시 내 파트너{소꼽 친구} 김 영란이는

천국에서 데려가고.....

남 몰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약이 많지 않었던 당시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콜레라 아니면 급성 이질 로 어여쁜 란이를 천국으로 데려갔을것이다.

 

그래서 영란이란 이름을 지금도 좋아한다.

파월했을 때 펜팔도 서울 노량진 @@고등학교 김영란과 일년여간 하였다.

 

어렸을 때 , 한참 자랄 나이에 잘 먹지 못해서인지 형제들 중에 막내인 내가 제일 약하다.

키도 제일 작은 170 cm이고, 체중은 58 kg정도로 항상 유지되다

지금 금연한지 5년이 돼서인지 65kg.

 

먹을거리도 많지 않을 뿐더러 머니가 많지 않었기 과자구경 한달에 두번이나 할까?

요즘 참 좋은 세상이다.

먹거리도 많고 머니도 좀 여유가 생겼으니.............The End.